8-5.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서의 십자가는 고린도전서 1:17-2:5의 주제인데, 특별히 세사의 지혜와 능력에 대조되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바울은 ‘복음’을 언급하면서 그 지혜와 능력에 대한 명상을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의 내용을 결정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는 것을 즉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가 내려야 할 결정이란 ‘말의 지혜’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이에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만약 우리가 사람의 지혜를 선택한다면, 십자가는 ‘헛된 것’이 되고, 발가벗겨지며, 완전히 파괴될 것이다(고전 1:17). 그래서 그는 ‘십자가의 도’를 선택하는데, 그는 이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 되지만, 동시에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전 1:18). 무능한 지혜인가, 아니면 어리석은 능력인가? 이것이 운명적인 선택이었으며, 이것은 지금도 그러하다. 선택이 아닌 하나의 조합은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을 합하는 것이다.
바울이 지혜를 버리고 능력을 선택한 것, 즉 세사의 지혜를 버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선택한 것은 이미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지혜로운 자의 지혜를 파괴하고 총명한 자의 총명을 좌절시키겠다는 그분의 의도를 밝히셨기 때문이다(고전 1:19). 따라서 만약 하나님이 그들을 대적하신다면, 이 세상의 현자와 학자와 철학자들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이미 그들의 지혜를 어리석게 함으로써 그들을 대적하고 계시지 않은가?(고전 1:20). 하나님은 바로 그렇게 해 오신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지혜 속에서, 먼저 이 세상은 자기의 지혜를 통해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도록 작정하시고 다음에는 계시되고 전파된 복음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자들이 구원을 얻게 되기를 기뻐하신 것이다(고전 1:21). 따라서 능력(구원의 능력)은 이 세상의 지혜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어리석음, 즉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복음에 있다는 것이 다시 분명해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전 1:22). 환언하면, 그들은 각각 복음의 메시기가 자기들에게 능력과 지혜에 의하여 증명되어야 할 것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와는 전혀 다르게,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데’(고전 23),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표준에는 애초부터 들어맞지 않는 분이신 것이다. 그리하여 거꾸로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방인들은 그것을 ‘어리석은 것’으로 이해한다. 이는 십자가가 그들에게 감동을 주시는커녕 그들을 화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그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십자가는 정반대의 것이다.
비록 연약함 속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이시며, 비록 외관상으로는 어리석게 보이지만 그분은 하나님의 지혜이신 것이다(고전1:24). 왜냐하면 사람들이 생각할 때 하나님의 어리석음으로 보이는 것도 사람들의 지혜보다 더 지혜로우며, 사람들이 하나님의 연약함으로 간주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고전 1:25). 요약하면, 하나님의 가치 체계와 인간의 가치 체계가 서로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는, 구원의 길로서는 가장 연약하고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가장 위대하게 드러난 것이다.
이 논리의 마감을 위한 바울의 두 가지 예화이다. 그 첫 번째 예화는 고린도인들이 그들의 부리심과 회심에서 얻은 경험에서 취한 것이고(고전 1:26-31), 다른 하나는 복음을 전하면서 얻은 바를 자신의 경험에서 취한 것이다(고전 2:1-5). 고린도인들의 경우, 인간적인 기준으로 보자면 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지혜롭거나 힘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사실 하나님이 지혜롭고 힘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세상이 어리석고 연약하다고 간주하는 자들을 선택하신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은 천하고 멸시받으며 없는 것들을 택하여 있는 것을 폐하신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목적은 인간의 자랑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자랑이란 인간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그리스도께 연합시킨 분은 하나님이시며, 또한 그들에게 하나님을 계시하셨다는 덤에서 그들의 지혜가 되시고, 그들에게 칭의와 거룩과 최후의 구속의 언약을 가져다주신 점에서 그들의 힘이 되신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고 있듯이, 누구든지 자랑하는 자는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으로 자랑해서는 안 되고 오지기 주 안에서만 자랑해야 한다.
전도자 바울의 경우, 그는 고린도에 올 때 사람의 지혜의 메시지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 또한 그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도 오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어리석고 계시된 십자가의 도를 가지고 왔으며, 또한 그 자신은 연역함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성령의 능력이 그 말씀을 확증해 줄 것을 의지하고 왔다. 그가 그런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가지고 그들에게 나아온 것은, 그들의 신앙이 사람의 지혜를 근거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 위에 확실히 서게 하기 위함이었다.
십자가의 복음은 결코 인기 있는 메시지가 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복음은 우리의 교만한 지성과 성격을 낮추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이면서(고전 1:24), 동시에 우리의 지혜이다(고전 1:30). 왜냐하면 십자가는 죄인을 구원함에 있어서 그분의 사랑과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또한 하나님의 능력, 즉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인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아울러 지혜와 능력 중에 어느 것이 가장 현저하게 계시되는지, 즉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인지, 혹은 우리 대신 그 심판을 담당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인지, 아니면 공의와 사랑을 완전하게 결합시키신 하나님의 지혜인지, 또는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인지를 결정하기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 사랑, 지혜, 능력의 동일한 행동이며, 그리하여 그것들을 동일하게 확증하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이 하나님이 우주 안의, 우주의 배후의 그리고 우주 너머의 실재임을 우리에게 확신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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