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정표/그리스도의 십자가

9-2. 그리스도의 승리

JORC구원열차 2009. 11. 16. 22:48

9-2. 그리스도의 승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귀와 그의 휘하에 있는 모든 ‘정사와 권세’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고 그것들을 무장 해제시키셨다.

 

하나님은 어떻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마귀에 대한 승리를 획득하였을까? 비록 사단의 결정적인 패배는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지만, 성경에서 마귀에 대한 하나님의 정복은 여섯 단계로 묘사되고 있다. 그 첫 번째 단계는 예언된 정복이다. 첫 번째의 예언이, 에덴동산에서 뱀에 대한 심판의 일부로서 하나님에 의하여 직접 주어졌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디ㅗ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우리는 이 여인의 후손이 메시아임을 알고 있으며,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악의 통치가 종식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예를 들면,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처럼, 하나님의 현실적인 통치를 선언하는 구약 본문이든, 혹은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처럼 메시아를 통한 그의 미래의 열국에 대한 통치를 선언하는 구약의 본문이든, 모든 본문은 사단의 궁극적인 파멸에 대한 또 다른 예언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예수님의 사역 속에서 시작된 정복이다. 예수님이 앞으로 자기를 정복할 자임을 안 사단은 그분을 제거하려고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다. 예를 들면, 헤롯의 베들레헴 영아 살해를 통하여, 십자가의 길을 피하게 하려는 광야에서의 시험을 통하여, 십자가의 필요성에 대한 베드로의 부인을 통하여(“사단아, 네 뒤로 물러가라”), 사단이 실제로 그 안으로 ‘들어갔던’ 유다의 배반을 통하여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귀신들이 쫓겨나고 병이 치료되며, 무질서한 자연이 주님을 인정하는 일들 속에서, 그분의 나라가 전진하고 사단이 그 앞에서 후퇴하는 것을 우리는 보는 것이다. 더욱이 예수님은 제자들을 자신의 대표자로 파견하여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도록 하셨는데, 그분의 제자들이 귀신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제자들 앞에 복종한 사실에 흥분되어 돌아왔을 때 예수님은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대답하셨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니카오, nikavw, 승리를 획득하다)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강한 자는 마귀를 가리키고, ‘더 강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재물을 나누는 것(마가복음에는 그의 집을 늑탈한다고 되어 있다)은 그의 노예들을 해방하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강한 자를 ‘제압하는 일’ 혹은 ‘묶는 일’은 세 번째의 결정적인 단계, 즉 십자가에서의 성취된 정복 때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요한에 의하면, 예수님은 세 번에 걸쳐서 사단을 ‘이 세상 임금’이라고 지칭하셨으며, 그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분명히 자신의 죽음 때에 최후의 결전이 벌어질 것을 예상하셨으며, 그 결전에서 악의 세력이 뿌리 뽑힐 것을 기대하셨다. 그분은 자신의 죽음에 의하여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시며’(히 2:14-15) 그에게 사로잡힌 자를 구해 주려 하셨던 것이다.

 

아마 그리스도의 승리가 제시된 가장 중요한 신약 성경 구절은 골로새서 2:13-15일 것이다.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하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의 일이 보여 주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측면, 즉 우리의 죄의 용서라는 측면과 우주적 세력인 정사와 권세의 정복이라는 측면을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죄는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것임을(카리조마이, carivzomai) 예증하고 있다.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는 그 자체로 율법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바울은 율법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한’(롬 7:12)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빚을 갚아 주심으로써 우리의 파산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빚을 제해 버리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기록되어 있던 문서까지도 없애 버리신다.”

 

이제 바울은 우리의 죄의 용서에서부터 악한 세력의 정복으로 옮겨가고 있으며, 악한 세력들의 패배를 묘사하기 위하여 세 개의 생생한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그 첫 번째 단어의 의미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마치 낡은 옷을 벗듯이 그 세력들을 ‘벗어 버렸다’(stripped)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세력들은 그를 덮고 있으면서, 또한 그에게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에, 그가 그것을 ‘벗어 버렸다’(discarded)는 것이다. 혹은 더 좋은 표현을 사용한다면, 이 말은 하나님이 그들의 무기를 ‘빼앗아서’(stripped) 그들을 ‘무장 해제시켰다’(disarmed)는 의미도 되고(NIV), '그들의 위엄과 힘‘을 제거해서 그들을 격하시켰다는 의미도 되는 것이다. 두 번째 단어는 그들이 지금은 ’무능한 세력‘이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알렸다‘는 의미이며, 세 번째 단어는, ’십자가에 의하여 그들을 이겼다‘는 것인데, 이 말은 아마 승리를 경축하는 포로들의 행렬을 가리키는 말인 것 같다.

이 모든 것은 생생한 이미지이다. 하지만 이 이미지들이 실젤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로,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케이로그랍혼’(ceirovgrafon, 손으로 쓴 것, 자필증서, 서류)에 대해 하신 일(도말하고 제하심)을, 정사와 권세들에게 그분이 하신 일(무장해제와 정복)과 함께 묶어 놓은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가. 그분은 그 속박을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그 능력을 십자가에 의하여 패배시키신 것이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의 유혹을 완전히 거부하심으로써 마귀를 정복하셨다. 십자가를 피하하는 유혹을 받으면서도 예수님은 순종의 길을 걸으셨으며, 그리하여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그분의 순종은 그분의 구원 사역에 필수적이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자기희생적 사랑에 의하여 예수님은 ‘선으로 악을’ 이기셨다(롬 12:21). 그분은 세상의 힘에 의존하는 어떤 방식도 거절하셨다. 하나님의 약함이 인간의 강함보다 더 강함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셧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지도 않으셨고, 자신의 원수를 미워하지도 않으셨으며, 힘을 사용하는 세상의 방식을 흉내 내지도 않으셨다. 예수임은 그분의 순종, 사랑 그리고 온유에 의하여 악의 세력에 대하여 위대한 도덕적 승리를 거두신 것이다. 그분은 자유롭고, 때 묻지 않으셨으며, 타협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마귀는 그분을 전혀 제압하지 못했으며,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넷째로, 부활은 확인되고 선언된 정복이었다. 우리는 십자가를 패배로 생각하고 부활만을 승리로 간주하지 않아야 한다. 도리어 십자가는 획득한 승리이고, 부활은 추인되고 선언되며 입증된 승리인 것이다. ‘죽음은 그분을 잡아 둘 수가 없었는데’, 이는 죽음이 이미 패배했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무기와 위엄을 박탈당한 악한 정사와 권세들은 이제 그분의 발아래 정복되어서 그분께 복종하고 있다.

 

다섯째로, 교회가 성령의 능력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사람들을 불러서 회개시키며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사명을 수행함으로써, 이 정복은 확장된다. 사단을 결박한 결과는 바로 그가 ‘만국ㄹ을 미혹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십자가의 위대한 승리와 그에 뒤이은 부활절과 오순절 이후에 시작된 만방에 대한 복음 전파를 가키는 것 같다.

 

여섯째로, 우리는 재림 시에 그 절정에 이를 정복을 기대하고 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은 교회의 선교로 채워지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승리를 그분의 죽음에 돌리는 것이 정당한가? 차라리 그분의 승리는 부활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분의 죽음을 이기신 것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심으로써가 아닌?

 

신약 성경에서 죽음과 부활이 언제나 함께 언급되며, 둘 중 어느 하나만 이야기되는 경우는 거의 없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수난에 대한 연속된 세 번의 예언에서 매번 자신이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을 첨가해서 말씀하셨다. 요한에 따르면 예수님은 또한 자기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셨고, ‘다시 얻는다’고도 말씀하셨다. 그 일은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졌다.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상라 있어”(계 1:18). 다음으로, 사도들이 언제나 그 둘을 함께 이야기 했다는 사실 역시 동일하게 명백하다. 베드로에 따르면 가장 초기의 사도적 케뤼그마(khvrugma, 복음전파)는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고...너희가...못박아 죽였으나...하나님이 살리셨으니”라는 것이었으며, 한편 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보이셨나니”라는 것이었다. 또한 바울의 편지들은 “우리가 에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산 자들로 하여금...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등의 구절로 가득 차 있다. 더욱이 복음의 성례는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증거로 인식되었다. 왜냐하면 세례 시에 세례 받는 사람은 상징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부활하는 것이며, 한편 성만찬에서는 그분의 죽으심을 이야기하는 바로 그 상징을 통하여 부활하신 주님 자신이 우리에게 알려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대속의 구주로 제시하기보다는 살아계신 주님으로 제시하는 사람들이 하듯이, 십자가 없는 부활만 전하는 것은 모두 심각하게 균형을 잃은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과 부활 사이의 불가분의 연결을 유지하는 것은 건전한 일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복음의 핵심이다. 가장 최호의 사도적 케뤼그마(khvrugma, 복음전파)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약 성경의 어느 곳에도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부활하셨다”라고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정복하신 것은 그분의 부활에 의한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쥐고 있는 자를 멸하신 것은 그분의 죽음에 의해서였다(히 2:14).

 

예수님의 성육신이 그분의 죽음을 가능하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분의 부활은 그분의 죽음의 효과를 확증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주장해야 하는 것은, 죄를 담당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은 십자가에서 완료되었고, 마귀와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는 십자가에서 획득되었으며, 또한 부활의 역할은 사람들이 버린 그 예수님이 정당하셨음을 변호하며,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능력으로 선언하여, 죄를 담당하는 그분의 죽음이 죄의 능력이 있음을 공개적으로 확증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만약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믿음과 전도는 헛된 것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이 하나님의 승인을 얻지 못한 것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4:25의 말씀은 바로 그 의미이다. 이 구절의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는 말씀을 언뜻 보기에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의 칭의의 수단이라고 가르치는 것 같다. 그러나 찰스 크랜필드는,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필요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분의 죽음 이후에 부활이 따라오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힘있는 일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복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모두 포함한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그분의 죽음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십자가를 강조한다. 왜냐하면 승리가 성취된 곳이 바로 십자가였기 때문이다. 부활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확신을 우리에게 심어주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는 것은’(벧전 1:3,21) 부활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