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장
악의 정복
모든 행동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아무 힘도 없이 못박힌 채로 사지를 벌리고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님을 보라. 그것은 완전한 패배로 보일 수밖에 없다. 만약 거기에 어떤 승리가 있다면, 거기에는 자만과 편견과 시기와 증오와 비겁과 잔인성의 승리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실제는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과 반대라고 주장한다. 악에 의한 선의 패배같이 보이는, 아니 실제로 그러한 것이 실은 더욱 확실한 선에 의한 악의 패배라는 것이다. 그 곳에서 정복당함으로써, 실은 그 자신이 정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의 무자비한 힘에 의하여 부수어지는 동안 실은 그분이 뱀의 머리를 부수고 계셨던 것이다(창 3:15). 희생자가 실은 승리자였으며, 그분은 여전히 그 십자가를 보좌로 하고 그 위에 앉아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룬 성취의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앞서 네 개의 이미지로 표현된 죄인의 구원과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계시 외에 십자가는 악의 정복을 이루었다는 사실이다.
9-1. 구스타브 아울렌과 「승리자 그리스도」
스웨덴의 신학자 구스타브 아울렌(Gustav Aulen)은 변증적 연구하기보다는 역사적 연구라고 할 수 있는 그 연구의 주제는, 구속론(救贖論)을 두 가지로 재구성하는 방법, 즉 안셀름과 연결된 그리스도의 죽음이 성부의 노를 진정시킨다는 ‘객관젹’ 혹은 ‘법칙’ 견해와, 아벨라르와 연결됭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권고하며 변화시킨다는 ‘주관적’ 혹은 ‘도덕적’ 견해의 두 가지로 재구성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극적이며’ ‘고전적인’ 견해라고 부를 수 있는 제삼의 견해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견해가 ‘극적인’ 이유는, 구속을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악의 세력들과 싸워서 승리를 획득하는 우주적인 드라마로 보기 때문이다. 또한 이 견해가 ‘고전적인’ 이유는,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것이 ‘기독교 역사의 처음 천 년 동안에 지배적인 구속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이 중요한 세 가지 설명은 모두 성경적 진리를 포함하고 있으며, 어느 정도는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다. 특히 그 세 가지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ㄴ의 일이 각 경우에 서로 다른 인격을 향하고 있다는 것임을 우리가 인식할 때 그러하다. ‘객관적인’ 견해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을 만족시키시는 것이며, ‘주관적인’ 견해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세워 격려하시는 것이며, ‘고전적인’ 견해에서는 하나님이 마귀를 정복하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차례로 구주, 교사, 그리고 승리자가 되시는데, 이는 우리가 바로 유죄하고, 무정하며, 속박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포사이스는 그의 책「그리스도의 사역」가운데 ‘세 겹과 밧줄’이라고 이름 붙인 마지막 장에서 여기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만족시키는’ 측면, ‘거듭나게 하는’ 측면, ‘승리의’ 측면을 언급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칭의, 거룩, 그리고 구속’이 되시는 고린도전서 1:30에 이런 측면이 서로 얽혀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비록 ‘어떤 사람들은...위대한 구원에, 어떤 사람들은 위대한 속죄에, 또 어떤 사람들은 위대한 중생에 마음이 더 끌리겠지만’, 그 모든 것은 구주의 전체 업적 즉 ‘악을 멸함, 하나님을 만족시킴, 그리고 인간을 성화시킴’의 부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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