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그리스도의 승리 안으로 들어감
예수님도 의도적으로 그분 자신과 우리 사이에 병행 관계를 설정하시고서 예수님이 승리하심으로써 아버지의 보좌에 동참한 것과 같이, 승리한 사람은 그분의 보좌에 참여할 권리를 얻으리라고 약속하지 않으셨는가.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이 병행 관계는 오직 부분적으로만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의 승리 안으로 들어가서 그 승리의 유익을 즐기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우리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지금 천상의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능력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한 우리는 또한 그분의 보좌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편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서 좌정하고 다스리고 있으며, 악의 정사와 권세까지라도 하나님에 의하여 그리스도의(따라서 우리의) 발아래 놓여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 동일한 영적인 힘이 우리를 대적하고 있으므로 만약 우리가 주님의 힘 속에서 강하며, 그분의 무기로 무장하고 있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결코 기 힘을 대적할 힘이 없다고 경고를 받고 있는 것이다(에베소서에도 그러하다). 한편으로는,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났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며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그 동일한 악한 자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으므로 우리는 조심하라는 경고를 받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승리주의자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결정적인 승리만을 보고 악의 힘에 댛난 사도의 경고를 간과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패배주의자가 되어서, 악의 무서운 적의만을 보고, 그리스도께서 이미 거두신 승리를 간과한다. 이 긴장은 바로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 사이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긴장의 일부이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딸이며, 따라서 더 이상 노예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유’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이미’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승리주의로 이끌게 된다. 이것은 ‘아직’ 임하지 않은 그 절정에 이른 나라에만 속한 도덕적인 것(무죄함)이든 혹은 육체적인 것(완전한 건강) 완전을 현재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아직’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패배주의로 연결되어서, 그리스도의 승리가 드러내는 ‘이미’와는 병존할 수 없는 계속적인 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카탈게오’(katargevw)라는 동사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이 단어는 영어 성경에서 자주 ‘파멸시키다’(destroy)로 번역되지만 실은 그렇게까지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도리어 그 단어는 ‘무력하게 혹은 무능력하게 만들다’라는 의미이며, 비옥하지 못한 땅과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고 있다.
그것들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그것들은 파괴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메말라 버렸다. 이 단어가 마귀와 우리의 타락한 품성 그리고 죽음에 대하여 사용될 때, 우리는 그것들이 아직 완전히 ‘파괴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마귀는 여전히 매우 활동적이며, 우리의 타락한 품성은 여전히 그 힘을 발휘하고 있고, 죽음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계속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그것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들의 힘이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제거된 것이 아니라 타도된 것이다.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혹은 ‘없애려’) 하심이니라”(요일 3:8)는 중요한 주장을 하였다. 이 ‘마귀의 일’, 그의 악독한 활동의 효과는 무엇인가? 로마서 5장부터 8장까지는 믿음으로 외롭게 된 사람의 생활을 묘사한다. “5장은 그 생활이 진노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6장은 그것이 죄로부터의 자유라고 말한다. 7장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그리고 8장에서는 우리가 죽음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관심을 가진 것은 이 목록에는 ‘육신’(우리의 타락한 인간본성)과 ‘세상’(하나님이 없는 사회)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교인들은 ‘세상, 육신, 마귀’라는 삼총사를 통하여 적어도 그 육신과 세상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거기서 건져 주셨고, 신약 성경에서 집중하고 있는 네 가지 ‘마귀의 일’은 율법, 육신, 세상, 그리고 죽음이다.
첫째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의 폭정 아래 있지 않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게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그 이유는 율법이 우리의 불신앙을 정죄하고 그리하여 우리를 그것의 ‘저주’ 혹은 심판 아래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심으로써, 그분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시며’, 우리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둘째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더 이상 육신의 폭정 아래 있지 않다. 바울의 ‘육신’(사륵스, savrx)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의 타락한 본성 혹은 구속되지 못한 인간성,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기 이전에, 우리가 출생, 유전, 그리고 성장 과정에서 가지게 된 모든 것을 가리킨다. 우리의 ‘육신’은 아담 안에서의 우리의 ‘자아’이므로 그것의 성격은 자기중심성이다. 바울은 이 자기중심성의 가장 악하고 추한 결과의 몇 가지 목록을 제시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성적 부도덕, 우상 숭배와 신비 종교(방향이 틀린 예배), 증오, 시기와 분노, 이기적 야망과 불화, 그리고 술 취함 등이 포함된다. 이런 삶을 사는 것은 ‘행락에 종노릇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직접 말씀하셨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그러나 예수님은 곧 “아들이 너릐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부언하셨다. 또한 우리의 타락한 본성과 그 이시김으로부터의 해방은 십자가를 통하여 온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나하려 함이니.” 그리스도는 그분의 십자가에 의하여 율법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육신에 대해서도 승리를 거두신 것이다.
셋째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폭정 아래 있지 않다. 만약 육체가, 마귀가 우리 안에 가지고 있는 발판이라면, 세상은 마귀가 밖에서 우리에게 압력을 가하는 수단이다. 왜냐하면 이런 맥락에서 ‘세상’은 하나님 없는 인간 사회를 가리키며, 교회에 대한 그 사회의 적대감은 어떤 때는 공개적인 조소와 박해에 의하여, 어떤 때는 교묘한 전복으로 즉 세상의 가치 체계와 표준들을 침투시키는 것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요한은 세상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서로 배타적이락 명확하게 선언한다. 왜냐하면 세상적이라는 말로 그가 의미하는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새의 자랑’이기 때문이다. ‘육신’과 ‘세상’은 필연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세상’이 구속되지 못한 사람들, 곧 그들의 사고방식이 구속되지 못한 자신들의 본성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요한이 강조하는 세상의 특징은 세상의 이기적인 욕망, 피상적인 판단(사물의 외적인 것 밖에는 못 보는 눈), 그리고 세상의 교만한 물질주의인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선언하셨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우리의 가치관이 바뀌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만큼 우리를 세상에서 분리시켜 주는 것은 없다. 세상이 우리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혀서, 우리가 세상의 폭정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은 바로 십자가를 통해서인 것이다.
넷째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의 폭정 아래 있지 않다. 웰링턴 공작은 “결코 죽음을 두려워해 본 적이 없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겁쟁이거나 거짓말쟁이임이 분명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 박사는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불안을 느끼지 않고 죽을 수는 없다”고 부언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일생동안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노예가 되어 있던’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실 수 있다. 이는 그 자신의 죽음에 의하여 그분이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그 힘을 빼앗은 것)하셨기 때문이다.(히 2:14).
죄가 바로 사망의 ‘쏘는 것’이며, 바로 죄 때문에 죽음이 그렇게도 고통스러운 것이 되기 때문이다. 죽음을 가져오는 것은 죄이며, 또한 그 죄가 죽음 이후에 심판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그것들을 제거하셨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그기에 대하여 아무런 대답도 없다. 그래서 경멸하는 투가 아니라 승리의 어조로 소리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5-57).
그러면 이제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죽음은 여전히 적이요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며 불쾌하고 품위가 없는 것이다. 실로 그것은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패배한 원수이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즉, 예수님은 죽은 신자의 부활이시오 산 신자의 생명이시라는 것이다. ‘네가 살리라’는 단순히 네가 생존하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네가 부활하리라는 의미이며, ‘네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는 네가 죽음을 피하리라는 뜻이 아니라 죽음이 그에게는 하나의 사소한 사건, 즉 충만한 생명을 향해 가는 도중에 있는 하나의 여정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되리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폐하셨다’는 기독교의 확신은(딤후 1:10) 어떤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는 질병까지도 폐하셨으며, 따라서 십자가로부터 우리는 사죄뿐만 아니라 치료까지도 주장해야 한다고 추론하게 만들었다.
맥크로산(T.J. McCrossan)은 이렇게 자기의 해석을 주장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바로 오늘 하나님이 그들읨 ha을 고쳐 주실 것을 기대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질병까지도 속하기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이다.” 맥크로산은 자기주장의 근거를 이사야 53:4에서 찾으면서 그 구절은 “참으로 그는 우리의 질병을 담당하시고 우리의 고통을 가져가셨다”라고 번역한다. 그는 특별히 히브리어 동사(나솨, hv;n:)를 강조하면서 그 단어는 ‘어떤 것을 위하여 형벌을 당한다’는 의미에서 짊어진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강조한다. 이 단어가 이사야 53:12에서도 사용되고 있으므로(‘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여기서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은...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지신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질병을 지셨다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해석을 받아들이는 데는 세 가지 어려움이 있다. 첫째로, 히브리어 동사인 ‘나솨’(hv;n:)는 다양한 구약성경의 문맥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 단어는 법궤와 성막의 다른 기구들을 나르는 데, 무기를 지니는 데, 그리고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데도 쓰이고 있다. 이사야 52:11에서는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사람들과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그 동사 자체만으로는 ‘...의 형벌을 담당한다’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가 목적어가 되었을 때만 그 단어를 그러한 의미로 번역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질병을 ‘담당하셨다’는 말은 전혀 다른 의미일 수가 있으며, 실제로 그것은 전혀 다른 말이다.
둘째로, 맥크로산이 제시한 개념은 의미가 없다. ‘죄의 형벌을 담당한다’는 말은 쉽게 이해된다. 왜냐하면 죄의 형벌은 죽음인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병의 형벌은 무엇인가? 그런 것은 있지도 않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질병을 위하여 ‘대속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범주를 뒤섞어 놓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의미가 있는 개념이 아니다.
셋째로, 구약성경의 성취에 가장 마음을 집중하고 있는 복음서인 마태복음은 이사야 53:4을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에 적용시킨 것이 아니라 그분의 치료사역에 적용시켰다. 그는 예수님이 ‘병을 다 고치신 것은’ 이사야를 통하여 말한 것을 성취하기 위함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그 구절을 다시 십자가에 적용시킬 자유는 없다. 베드로가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나니”라는 구절을 인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사야와 베드로가 그 말을 한 문맥을 살펴보면, 그 ‘나음’이라는 말을 가지고 그들이 생각한 것이 죄로부터의 구원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과 똑같이 우리의 질병을 위하여 죽으셨으며, 따라서 ‘속죄 속에는 치료가 있다’거나 혹은 사죄와 마찬가지로 병의 치료도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라고 주장하는 일은 없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몸에 관한 바울의 말처럼 당연히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10-11).
사도는 여기서 우리 인간의 몸의 허약함과 죽을 수밖에 없는 성질을, 특히(그의 경우에서의) 육체적인 핍박과 연관지어 언급하고 있다. 그의 말은 물리적인 공격으로부터의 생존만을 가리키는 것 같지도 않다. 그는 이것을 가리켜서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9절)라고 했다. 아니,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지금 우리의 죽을 몸, 아니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 몸속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말이 두 번 반복됨)이 ‘나타나고’(이 말 역시 두 번 반복됨) 있다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피곤함, 아픔, 그리고 통증을 느낄 때라도 우리는 우리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의 힘과 생동력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와 동일한 생각을 16절에서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의 생명이 계속해서 우리들의 모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 하나님이 사람의 몸속에 질병과 싸우며 건강을 회복시키는 놀라운 치료의 과정을 넣어 주셨다는 것, 하나님은 기적적인 치료(아무 방편도 사용하지 않고 즉각적이며 영구적으로)를 하실 수 있으며 또한 가끔 그렇게 하신다는 것, 모든 치료는 하나님이 하시는 치료라는 것, 이런 것들을 우리는 기꺼이 확신을 가지고 단언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죄인의 용서를 기대하듯이 언제나 아픈 자의 병이 치료되고, 죽은 자가 살아날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아직’을 무시하고 ‘이미’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때까지는 우리의 몸이 질병과 죽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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