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정표/그리스도의 십자가

9-4. 요한계시록

JORC구원열차 2009. 11. 16. 22:51

9-4. 요한계시록

 

신약성경의 책들 중에서 그리스도의 승리를 가장 명확하고 힘있게 증거하는 책은, 우리가 ‘요한계시록’이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는 기독교의 묵시이다. ‘승리’를 표시하는 어군(‘이기다’라는 의미의 니카오<nikavw>, ‘승리’라는 의미의 니케<nivkh>)의 절반 이상이 이 책에서 발견된다.

 

도미티안(Domitian) 황제의 치하(주후 81-96년)에서 쓰인 것이 확실한 이 책의 배경은, 이제는 간헐적이 아니라 조직적인 교회에 대한 박해와 황제 숭배의 관행이 점점 극심해 가던 시기였으며, 황제 숭배를 거부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새로운 박해에 직면해야 했던 때이다. 요한계시록이 하고 있는 일은, 그 책의 묵시적 형식에 때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실체를 감추고 있는 장막을 걷어서, 우리 눈에 보이는 장면의 배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여 주는 것이다. 여기서는 교회와 세상의 투쟁은 단지, 그리스도와 사단, 어린양과 용 사이에 벌어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이 가시적이 세상의 무대에서 표현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 ‘땅의 임금들의 머리’(계 1:5), ‘처음이요 나중인 자’, ‘산 자’(계 1:17-18)로 지칭하는 말로 시작되며, 또한 이런 명칭들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그분을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영화되셔서 통치하시는 주님으로 묘사하는 말로 시작된다.

 

그 다음으로는 로마의 관할 아래 있는 아시아 지방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가 등장하는데, 각각의 편지는 ‘이기는 그’에 대한 적절한 약속으로 끝난다. 그 다음에는 이야기의 초점이, 땅 위의 교회들을 순회하는 그리스도로부터 천상에서 하나님의 보좌에 함께 좌정하신 그리스도에게로 옮겨간다. 그래서 그 다음에 네 장에서는(4-7장) 보좌가 중심이며, 모든 것은 그 보좌와의 관계로 묘사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자와 어린양으로 묘사된다(이 결합된 이미지는 그분의 힘이 자기희생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보여 줄 것이다).

 

‘보좌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그리스도가 보인다. 오직 그분만이 봉인된 두루마리(역사와 운명의 책)를 열기에 합당하신 이유는 그분이 ‘이기었기’ 때문이다(계 5:5). 그리고 그분이 구둔 승리의 특징은 그분이 죽임을 당하셨으며, 그분의 피로써 하나님을 위하여 모든 나라에서 사람들을 사셨다는 것이다(계 5:9).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인을 떼고 나팔을 부는 음침한 사건들(전쟁, 기근, 질병, 순교, 지진과 생태학적 재난)도 여전히 어린 야의 지배하에 일어나는 사건들이며, 그 어린 양은 이미 통치하고 있고 그의 완전한 나라가 곧 그 절정에 이를 것임을 이해시키려 한다(계 11:15-18).

 

하지만 관심은 12장의 환상에 집중되는데, 이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이 장에 이 책의 중심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요한은 아이를 밴 한 여인을 보는데, 그 여인은 해를 옷처럼 입고 달을 발판으로 삼고 있으며, 열두 별을 면류관처럼 쓰고서, ‘만국을 다스릴’ 운명을 가지고 있는 한 아들을 낳으려는 순간에 있다(5절). 이 아이는 메시아임이 분명하고, 그 여인은 메시아를 낸 구약 교회임이 분명하다. 거대하고 이상하게 생긴 붉은 용이(9절에서 이 용은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자로 밝혀진다) 그 여인의 앞에 서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아니는 ‘하나님 앞과 그 보자 앞’으로 올려 졌고, 그 여인은 하나님이 그 여자를 위하여 예비하신 광야의 처소로 도망했다(5-6절).

 

그 다음에는 하늘에서 전쟁이 일어나는데, 그 전쟁에서는 ‘영과 그의 사자들’이 패배를 당한다. 그리스도께서 땅에서 하늘로 들림 받으시게 되가 그 용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던져졌다. 그 승리는 십자가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백성이 그 용을 이긴 것은 ‘어린 양의 피를 인함’(11절)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무기도 그와 싸우기에 적합하지 않은데,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 된 줄로 알므로 크게 분내어 저희에게 내려갔기” 때문이다(12절).

 

그러므로 바로 이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마귀는 패배해서 그 권좌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이것이 그의 활동을 끝내지는 못한다. 자기의 임박한 종말을 알았기 때문에 그의 활동은 도리어 배가된다. 그에 대한 승리는 이미 획득되었지만 그와의 고통스러운 전투는 여전히 계속된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그는 세 동맹자에게 의지하는데, 이 동맹자가 이제 요한의 환상 속에서 두 마리의 추한 괴물의 모습, 그리고 추잡하고 번지르르하게 꾸민 음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비록 이것들이 로마의 서로 다른 세 가지 측면, 즉 박해자 로마, 속이는 자 로마, 그리그 유혹하는 자 로마를 나타내지만, 이 세 가지는 모두 로마 제국을 가리키는 상징임이 분명하다.

 

그 첫 번째의 괴물은 요한은 이 괴물이 바다에서 나오는 것을 보는데, 그 용과 똑같이 일곱 개의 머리와 열 개의 뿔을 가지고 있으며, 용이 그에게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권세를 주었으므로 그를 따르는 자가 세상에 많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괴물이 하나님에 재하여 교만한 모독적인 말을 하며(계 13:5), ‘성도들과 싸우며’ 심지어 감정적으로 ‘이기는’ 권세를 받았으며(7절), 어린 양을 따르는 자 이외의 모든 자로부터 경배를 받는다(8절)는 사실이다. 이것이 로마 제국의 절대적인 권세이다. 그러나 이 예언의 성취는 로마 제국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교회를 박해하며, 그 시민들로부터 무조건적인 칭송을 요구하는 모든 폭력적인 나라에서는 ‘바다에서 나온 무서운 괴물’이 다시 그 추한 머리와 공격적인 뿔을 쳐드는 것이다.

 

두 번째의 괴물은 ‘땅에서’ 올라온다(11절). 그는 첫 번째 괴물의 추종자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는 첫 번째 괴물의 권세를 행사하고 그에 대한 경배를 더욱 진작시키며, 그 일을 위하여 기적적인 표적들을 행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괴물의 특징이 박해였다면 이 두 번째 괴물의 특징은 기만이다(14절). 사람들은 첫 번째 괴물에게 경배(황제 숭배를 가리키는 말)를 강요당하며, 짐승의 표를 받도록 강요당하는데, 이 표가 없이는 세상일에 참여할 수가 없다. 이 두 번째의 짐승은 뒤에 ‘거짓 선지자’(계 19:20)라고 불린다. 비록 요한의 시대에는 이 괴물이 황제 숭배를 강요하는 자로 상징화되었지만, 우리 시대에는 이것이 모든 거짓된 종교와 이데올로기, 즉 사람들의 경배를 ‘살아계신 참 하나님’ 외의 다른 존재에게로 유도하는 것을 상징한다.

 

용의 세 번째 동맹자는 그 후의 몇 장에서는 소개되지 않는데, 그 대신 이 몇 개의 장에서는 어린 양의 최후의 승리가 몇 번에 걸쳐서 확신 있게 예언되고 경축된다. 세 번째 동맹자는 ‘큰 음녀’(계17:1)라고 불린다. 여기서 다시 이 여자는 말할 것도 없이 로마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그녀는 ‘큰 성 바벨론’(계 14:8과 17:5),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계 17:18), 그리고 ‘일곱 산’(계 17:9) 위에 위치한 성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상징되는 것은 로마의 도덕적 타락이다. 그녀는 붉은 짐승을 타고 있으며, 자색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있으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한’ 금잔을 손에 들고 있다(4절). 그녀의 유혹하는 힘은 “땅에 거하는 자들고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2절).

 

이 음행이 성적인 부도덕을 말하는 것이든, 아니면 영적인 우상 숭배를 말하는 것이든 간에, 그녀의 죄는 이뿐만 아니다. 우리는 뒤에 노예 제도를 포함한 국제 교역의 결과로 그녀가 얻은(계 18:11-13) ‘도에 지나친 사치’(계 18:3), 여기에서 밝히지 않은 ‘죄악들’과 ‘죄’(5절), 그리고 그녀의 거만한 자랑(7절)에 대하여 읽게 된다. 그녀의 왕들이 어린 양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킬 것이지만,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것이다(계 17:14). 그리고 18장과 19장에서는 ‘큰 성 바벨론’의 멸망이 그림같이 생생하게 묘사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필연적이고 정당한 일로 변호되고 있다.

 

승리자 그리스도는 백마를 탄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는 자’로 나타난다(계 19:11-16). 그리고 마지막 세 개의 장에서는 사단과 죽음의 최후의 멸망,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이 묘사되는데, 거기서는 하나님이 완전한 통치를 확립하시기 때문에 더 이상 눈물이나 죽음, 고통이나 밤이 없을 것이다.

 

마귀는 전략을 바꾸지 않았다. 비록 로마 제국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박해하고 속이고 타락시키는 다른 체제들이 그것을 대신하여 일어났다. ‘땅에서 올라온 짐승’ 혹은 ‘거짓 선지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마귀는 여전히 다른 종교, 새로운 신비 종파, 그리고 세속적인 이데올로기를 통하여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큰 음녀’에 대하여 말하자면, 전통적인(즉 기독교적인) 도덕에 대한 공격이 이제는 교회의 방어선 안으로까지 파고 들어왔다. 인간의 생명의 신성함에 관해서도(즉, 낙태와 태아에 대한 실험과 관련된) 교회는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요한계시로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단을 이기셨으며, 앞으로 언젠가 그를 완전히 파멸시키시리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승리 안으로 들어가며 사단의 세력을 이길 수 있는가? 어떻게 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활에서뿐만 아니라 대적이 찬탈한 이 세상 속에서 그 대적을 전복시킬 것을 바랄 수 있는가?

 

첫째로, 우리는 마귀를 대적하라는 권고를 받는다.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또한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우리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면 우리는 그를 대항하여 굳게 설 수 있다(엡 6:10-17). 우리는 그를 피하여 달아나게 해야 한다. 도리어 우리는 그를 대항함으로써 그가 우리를 피하여 달아나게 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우리 자신의 이름으로 “사단아, 물러가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십자가의 승리를 선언하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승리자 그리스도(Christus Victor)의 이름으로, 너를 십자가에서 이기신 이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사단아, 물러가라.” 그러면 이 명령은 효력을 발생한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해야 한다. 십자가를 전파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써 우리는 사람들을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행 26:18) 돌아오게 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되면 사단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의 전진 앞에서 피하여 움츠리게 될 것이다. 다른 어떤 메시지도 그와 동일한 내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다른 어떤 이름도 그와 동일한 방식으로 성령에 의하여 옹호되고 칭송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생활고 교회의 선교에서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사단을 이기며, 그를 억제할 수 있다.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다”(계 12;11)는 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실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타협하지 않는 증거가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또한 그분을 위해서는 기꺼이 목숨이라도 내놓으려는 자세가 동일하게 중요하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요소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과 메시지의 내용, 즉 모든 악의 세력에 대한 어린 양의 객관적이고 결정적인 승리인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을 때 이 승리를 거두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