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정표/그리스도의 십자가

10-4. 십자가와 성찬식

JORC구원열차 2009. 11. 19. 23:52

10-4. 십자가와 성찬식

 

논쟁에서 폭풍의 눈과 같은, 성찬식 제사는 오늘날 ‘가톨릭’측으로부터 참으로 복음적인 표현을 발견하고 있다. 즉, 제사적 행동이란 그리스도께서 다시 제물이 되신다거나 또는 그분의 단 한번의 제사에 추가하는 다른 제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참된 제사는 대제사장인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의 몸의 지체로서 하나님 앞에 그분의 제사를 드리고, 그분과 자신의 연합을 통해 제사 안에서 자시 자신이 드려지도록 하기 위해 모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이 되풀이될 수 없고, 성찬식은 화목적인 것이 아니며, 우리가 드리는 제사는 공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확고하게 확립했는데도 갈보리와 성찬식을 여전히 딸 구분 지어야만 하는가? 결국 신약에서는 우리를 제사장이라고 부르며, 우리로 하여금 여덟 가지의 ‘영적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권고한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자신을 주는 사랑과 순종을 우리가 열망해야 할 모델로서 우리 앞에 제시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신을 드리는 것이 그분이 자신을 드리는 것에 합병되도록 하는 것보다 더 좋고 더 건전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보다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말하듯이, ‘신실한 자들의 영적 제사’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연합하여 완전해지지’ 않겠는가? 이것은 적절하고도 합리적인 것이 아닌가? 반대하는 것은 심술궂고 완고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실제로 심각한 반대가 존재한다. 첫째는 사실상 신약 저자들도 우리의 제사가 그리스도의 제사와 연합된다는 개념을 표현한 적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제사는 우리의 구세주요 중보자아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through, 벧전 2:5) 드려져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바 죽음으로부터 건진 새로운 삶을, 그분만을 위해 살도록 하는 그분의 사랑으로 강권함을 받아 제사 안에서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로’ 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드려야 한다(고후 5:14-15).

 

우리는 크랜머가 구분한 두 가지 제사, 곧 ‘화목적인’(죄를 속하는) 것과 ‘성찬식적’(찬양과 경의를 표현하는) 제사를 다시 회상해 보아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제사는 두 가지를 다 포함하는 데 반해 우리의 제사는 단지 ‘성찬식적’일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은 또한 우리 대신에 우리가 죽을 죽음을 죽으심으로 자신을 우리를 위한 대속물로 주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의 대리자로서 죽으심으로써,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경험했어야 할 죽음을 겪지 않게 해주셨으며, 우리의 대표 또는 본보기로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십자가는 무엇보다도 화목적인 것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유일무이한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의 회심을 생각해 볼 때 우리의 제사는 실로 십자가에 대해 회개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하찮은 반응으로 나타날 뿐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우리가 일단 그리스도께로 오고 환영을 받았다면 상황은 변하지 않는가? 이제 우리가 일단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것에 합병될 수 있는, 무언가 드릴 것을 갖게 되지 않겠는가? 이것이 로완 윌리엄스 교수가 말한 요점이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드린 제사의 결과는 정확하게 우리를 ‘예배하는’ 존재, 즉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찬양과 우리의 상징적인 선물을 박으실 것임을 아는 그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라는 개념을 회복하고자 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드리심의 결과는 우리를 드릴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 우리를 제사장으로 세워 섬기기에 합당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배는 우리에게 회심하지 않은 불신자의 배역을 맡겨 우리의 구원을 재현하도록 구성되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으로,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간주하고 그러고 나서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우리의 감사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드리신 것과 연합시키고 있지 않은가? 이 질문들은 호소력이 있다.

 

기독교 공동체는 십자가의 공동체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십자가에 의해 생겨났으며, 그 예배의 초점은 이전에 죽임을 당하셨으나 지금은 영광을 받으신 어린 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우리의 찬양과 감사의 제사를 끊임없이 드리는, 경축하는 공동체, 성찬식의 공동체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끝없는 축제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유월절 양이 우리를 위하여 희생을 당하셨으므로 우리가 지키는 절기는 그 어린 양의 희생을 그것에 따르는 영적 축제와 함께 기쁘게 기념한다. 이 기념하는 축제에 우리 모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나누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드리시는 제사도 아니고, 심지어 그 제사 해위도 아니다. 오직 그것에 의해 그분이 이루신 유익을 나누고 있을 뿐이다. 이 큰 희생으로 인해,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얻어 준 귀중한 축복으로 인해 우리는 심지어 영원한 세계에 가서까지도 어린 양을 공경하고 찬양하는 일을 결코 그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