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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이정표/그리스도의 십자가

제11장-자기 이해와 자기희생

by JORC구원열차 2009. 11. 19.

제 11 장

자기 이해와 자기희생

 

십자가는 하나님께 대한 태도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태도 역시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따라서 십자가의 공동체는 경축하는 공동체일 뿐 아니라 자기 이해의 공동체이기도 하다. 자기 이해란 자기를 주기 위한 것이다. 자신이 갖고 있는 알지도 못하는 것을 어떻게 줄 수 있겠는가? 바로 그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알려는 노력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이 질문들은 십자가와 관련짓지 않고는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을 수 없다.

 

인종차별이나 성적 차별 그리고 ‘불필요한’ 존재로 취급받을 때 입는 마음의 상처들은 사람들의 자신감을 침식시켜 버린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스스로를 무가치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느끼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이러한 일련의 영향들에 대한 과잉 반응으로 나타난 것이, 반대되는 방향에서 사람들의 큰 호음을 받고 있는 ‘인간 잠재력’ 운동이다. 이 운동은 “너 자신이 되라. 너 자신을 표현하라. 너 자신을 성취하라!”고 부르짖는다. 이 운동은 ‘할 수 있다는 사고’ 및 ‘적극적인 정신 자세’의 필요와 함께 ‘적극적인 사고의 능력’을 강조한다. 자부심을 도야하고자 하는 바람은 칭찬할 만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개발할 수 있는 잠재 가능성이 사실상 무한하다는 인상을 준다.

 

불행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도 지지하신 바 있는 모세의 계명, 곧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을 우리 자신을 우리 이웃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잘못 생각하여 이러한 동향에 빠져들도록 내버려두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계명은 그런 뜻이 아니다. 이에 대해 세 가지 논증을 제시할 수 있다.

 

첫째로, 문법적으로 예수님은 “첫 번째 계명은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두 번째 계명은 너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세 번째 계명은 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단지 첫 번째 큰 계명을 말씀하시고, 위에 나온 것과 같은 두 번째 계명을 말씀하셨을 뿐이다. ‘네 몸과 같이’라는 말을 덧붙인 것은, 이웃 사랑에 대한 개략적이며 편리하고도 실제적인 지침을 제공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든지...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기’(엡 5:29)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 계명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는 황금률과 같다. 우리 대부분은 정말로 자신을 사랑한다.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대접을 받았으면 좋을지 알고 있으며, 이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접해야 할지를 가르쳐 줄 것이다. 자기 사랑은 칭찬받을 만한 미덕이 아니라 인식되어야 할 사실이고, 사용되어야 할 규칙인 것이다.

 

둘째로, 언어학적으로 그 동사는 ‘아가파오’(ajgapavw)이며, ‘아가페’(ajgavph)사랑이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기희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기를 향할 수가 없다. 우리 자신을 섬기기 위해 우리 자신을 희생한다는 생각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셋째로, 신학적으로 성경에서는 죄를 자기 사랑으로 이해한다. 루터가 말했던 대로, 죄는 자신에게로 굽는 성향이다. ‘말세’의 징조 중 하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신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딤후 3;15). 그들의 사랑은 하나님과 이웃에서부터 자기 자신에게로 방향을 잘못 돌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는 자기 혐오와 자기 사랑이라는 두 극단을 피하면서 우리 자신을 경멸하지 않으면서 우쭐거리지도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너무 낮거나 너무 높은 자기 평가를 피하고 그 대신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는 바울의 훈계에 순종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대답을 준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우리에게 자기를 부인하면서 동시에 자기를 긍정할 것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상호 보충되는 권고를 고찰해 보기도 전에, 십자가는 우리에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이미 새로운 백성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 점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대속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것이라고 불릴 수 있다.

 

‘대속자’란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행동함으로써 그 다른 사람이 행동할 필요가 없도록 하는 사람이다.

 

‘대표자’란 다른 사람을 위해 행동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그의 행동에 포함시키는 사람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대속자로서 우리 스스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우리를 위해 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죄와 심판을 담당하셨다. 하지만 우리의 대표자로서 그분이 행하신 일을 우리 역시 그분과 연합됨으로 행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분과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산 것이다.

 

이상하지만 놀라운 이 주제에 대한 바울의 가장 포괄적인 해설이 로마서 6장 초두에 나온다. 그것은 죄가 더할 때 은혜가 더욱 넘치므로 은혜를 훨씬 더 많이 받을 수 있도록 계속해서 죄를 짓는 편이 낫다는 악한 제안에 대한 답변으로 전개된 것이다(롬 5:20-6:1). 바울은 단호하게 그러한 생각을 거부한다. 단지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고’ 따라서 더 이상 죄 안에서 살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롬 6:2). 그 죽음은 언제 일어났는가? 우리가 세례 받을 때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사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3-4). 그렇다면 세례는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한 것을 가시적으로 생생하게 표현해 준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해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으며’ 더 이상 그 안에서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를 해결해 주는 핵심은 바로 우리가 내적으로는 믿음으로, 또 외적으로는 세례로서 참여한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에 대한 죽음이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에 대하여 살으심이니”(10절). 오직 한 가지 의미로만 예수님이 ‘죄에 대하여 죽으셨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그분이 죄의 형벌인 죽음을 담당하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23절)이기 때문이다. 죽으심으로 죄의 삯을 지불하시고, 또는 그 형벌을 담당하시고 나서, 그분은 새 생명으로 부활하셨다. 우리도 그분과 연합함으로 그렇게 되었다. 우리 역시 죄에 대하여 죽었다. 우리가 죄의 형벌을 개인적으로 담당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그것을 담당하셨다), 그분의 죽음이 가져오는 유익을 함께 누린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죄의 대가는 이미 치러졌고 빚은 지불되었으므로, 우리는 죄책과 정죄의 두려운 짐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우리는 죄 문제를 이미 처리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부활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것에 대해 죽은 그 죄 안에서 계속해서 거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도 죄가 우리 안에서 왕노릇 하지 못하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12-14절).

 

우리를 우리의 옛 생활로부터 끊어 버린 것은 죽음과 부활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다시 그것으로 돌아가는 것을 생각이라도 할 수 있단 말인가?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로 ‘여겨야’ 한다(11절).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했으며, 그래서 우리 자신이 죄에 대하여 죽었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이 사실을 기억하고 그것과 모순되지 않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한 이 기본적인 사실, 곧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따라서 죄와 죄책과 수치의 옛 삶은 끝났고 거룩함과 용서와 자유라는 전적으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는 기본적 사실을 인정한다면, 새로운 자아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우리의 새로운 자아는 비록 구속되긴 했지만 여전히 타락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중적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 즉 십자가의 조명을 받은 자기 부인과 역시 십자가의 조며을 받은 자기 긍정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