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정표/그리스도의 십자가

10-2. 그리스도의 희생과 우리의 희생

JORC구원열차 2009. 11. 19. 23:51

10-2. 그리스도의 희생과 우리의 희생

 

비록 그리스도인의 삶이 계속적인 축제이긴 하지만, 성만찬은 특별히 기독교에서 유월절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교회의 경축 생활의 중심이다. 그것은 예수님에 의해 유월절 동안에, 실로 유월절 식사를 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제정되었다. 또 예수님은 조상들이 먹던 “고난의 떡이다”라는 의식문을 의도적으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니라”는 말씀으로 바꾸셨다. 기독교 절기 때 먹고 마시는 빵과 포도주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되돌아보며, 그분이 거기에서 당하신 고난과 이루신 일을 감사함으로 회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개신교회는 전통적으로 세례와 성찬을 복음의 중심 진리들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복음의 성례전’, 또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구원의 주도권을 눈에 보이게 설명해 주기 때문에 ‘은혜의 성례전’이라고 불러 왔다. 복음의 성례전이 구현하고 있는 기본적인 방향은, 인간에게서부터 하나님께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인간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성만찬 시에 그 극적 사건의 본질은 떡을 취하여 축사하고 떼어서 주는 것과, 포도주를 취하여 축사하고 부어서 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떡과 포도주를 우리가 우리에게 주지는 않으며 주어서도 안 된다.

 

세례는 믿음을 고백하기에 적절한 기회이며, 성만찬은 감사를 드리기에 적절한 기회다. 성만찬의 명칭으로 ‘성찬’(유카리스티아,eujcaristiva ; 감사)이라는 말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제사’란 ‘드린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므로 ‘성찬식 제사’란 말이 고안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옳은 것인가?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첫째로, 우리는 모두 우리가 성만찬 때 행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자기희생과 다음 다섯 가지 면에서 관련된다는 점에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한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그분은 말씀하셨다(고전 11:24-25). 실제로 떡과 포도주를 갖고 행하는 정해진 의식들은 그 기념을 생생하고 극적인 것으로 만든다. 둘째로, 우리는 그 유익에 참여한다. 그 의식의 목적은 ‘기념하는 것’(commemoration)을 넘어서 ‘친교’(코이노니아,koinwniva)로 나아간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고전 10:16). 이런 이유로 해서 성만찬이 ‘거룩한 친교’(Holy Communion; 그것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함께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또는 ‘주님의 만찬’(Lord's Supper; 그것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먹고 심지어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이라고 불리는 것은 옳다. 셋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전한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이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 비록 그분의 죽음은 수십 세기 전에 일어났지만, 그 죽음을 전하는 일은 오늘날에도 계속된다. 그러나 성만찬은 일시적인 규정이다. 그것은 주님의 죽음을 회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이 오실 것을 기다린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을 기념하는 잔치일 뿐 아니라 그분의 하늘 잔치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 전체에 걸쳐 행해지는 것이다. 넷째로, 우리는 우리의 연합을 그분의 희생의 공로로 돌린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방 안에서 혼자 성만찬에 참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기념하기 위해서 ‘함께 모인다’(고전 11:20).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이 주는 유익을 공동으로 나눠 가졌다는 것으로 인해 서로 연합됨을 인식한다.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전 10:17). 다섯째로, 우리는 그분의 희생에 대해 감사를 드린다. 감사의 표로서 우리 자신, 곧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그분을 섬기는 ‘산 제사’로 드린다(롬 12:1).

 

그렇다면 우리는 성만찬을 나눌 때마다 십자가상에서의 그분의 희생을 기념하고, 참예하며, 전하고, 우리의 연합의 근거로서 인정하고, 삼사의 예배로 응답해야만 한다. 그러나 남아 있는 문제는, 십자가사에서 드리신 예수님의 제사와 우리가 성찬식 때 드리는 r마사의 제사 사이에 곧 그분의 ‘죽음의’ 제사와 우리의 ‘산’제사 사이에 어떤 더 밀접한 관계가 있는가의 여부다. 16세기 이래로 기독교계를 분열시켜 왔으며, 오늘날도 전 교회적으로 격렬한 논란이 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미 사도 시대가 끝난 직후에 초대교회 교부들은 성만찬과 관련해서 제사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 안에서 말라기 1:1이 성취된 것을 보았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그러나 원래 제사 시에 드려지는 ‘깨끗한 제물’인 빵과 포도주는 창조물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사람들의 감사의 표시였다. 고대의 저자들은 사람들의 기도와 찬양, 가난한 자를 위한 자선 같은 것도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간주하였다. 3세기 중반 카르타고의 감독인 키프리아눅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성만찬 자체가 참된 제사로 불렸다. 즉 주님의 수난이 사제들(그들의 제사에서 수행한 역할은 구약의 제사장들의 역할과 유사란 것이었다)에 의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으로 본 것이다. 즉, 사제들은 떡과 포도주의 형태로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산 자와 죽은 자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께 화목 제물로 드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개혁가들은 바로 이것을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루터와 칼빈의 성찬식 교리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모든 종교개혁가는 미사 때 드리는 제사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서로 연합되어 있었으며 십자가와 성례전, 우리를 위해 드리신 그리스도의 제사와 우리가 그분을 통해 드리는 제서를 분명히 구분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었다.

 

크랜머는 그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표현한다.

어떤 종류의 제사가 있는데, 그것은 화목제 또는 자비제, 즉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를 가라앉히고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자비와 용서를 구하는 제사라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구약에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특정한 제사들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얻을 수 있는 제사는 단 하나밖에 없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다른 화목 제사는 이전에도 결코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다. 이는 동반자도 후계자도 허용하지 않는 우리의 대제사장 되신 그리스도의 영예와 영광이다....

 

또 다른 종류의 제사가 있는데, 이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키지는 못하나 그리스도에 의해 화목된 사람들이(즉 그들에 의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입증하기 위해, 그리고 우리가 그분께 감사하고 있음을 보이기 위해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찬미와 찬양과 감사의 제사라고 불린다.

 

첫 번째 종류의 제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드리셨다. 두 번째 종류의 제사는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에 의해, 즉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드린다.

 

크랜머는 성찬식이 제사장에 의해 제단에서 드려지는 제사가 아니라, 목사에 의해 성찬대에서 드려지는 만찬임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제사가 갖는 독특성을 보장하는 점에서나, 우리의 제사를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감사를 표현하는 것으로 정의 하는 점에서 크랜머의 교리를 뒷받침해 준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드리신 제사가 유일하게 궁극적인 것이라는 점은 ‘하팍스’(a{pax, 단번에) 또는 ‘엡하팍스’(ejfavpax, 단번에)라는 부사에 암시되어 있다. 이 말은 히브리서에서 다섯 번에 걸쳐 그런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히 7:27),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 9:26). 바로 그 때문에 똑같은 제사를 되풀이해서 드리면서 자신의 성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서 있었던 구약의 제사장들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자신의 완성된 일로부터 안식을 누리고 계시다(히 10:11-12).

 

비록 예수님의 속죄 사역은 완수되었지만 그분은 여전히 계속해서 하늘의 사역을 하고 계신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십자가상에서 단번에 드려졌다. 또한 그 제사가 받아들여지도록 간청하면서 그것을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은 부활에 의해 공공연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계속해서 하늘의 사역을 하고 계신 것은, 오히려 우리의 변호자로서 그 제사에 근거하여 죄인들을 위해 ‘중보’하시기 위함이다. 그분의 ‘영원한 제사 직분’은 바로 이 때문에 존재한다. 왜냐하면 중보는 제사와 마찬가지로 제사장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제사가 유일하다는 것은 우리가 드릴 제사들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제사의 특성과 목적이 서로 다르다는 뜻이다. 그것들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화목적인 것이 아니라 감사의 응답을 표현하는 성만찬적인 것이다. 이는 크랜머의 입장을 뒷받침해 주는 두 번째의 성경적 증거이다.

 

신약에서는 교회가 제사장적 공동체로서 ‘거룩한 제사장’이며 또한 ‘왕 같은 제사장’이며, 그 안에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똑같이 ‘제사장들’이라고 묘사된다. 이것이 종교개혁가들이 매우 강조했던 유명한 ‘만인 제사장설’이다. 이 보편적 제사장설의 결과로, ‘제사장’(히에로스, iJerov")이라는 말은 신약에서 결코 안수 받은 목사를 가리키는 데 쓰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목사 역시다른 사람들이 드리는 제사를 함께 드릴 뿐이며, 그들이 드리는 제사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드리는 것과 별다른 제사는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어떠한 영적 제사를 그분께 드리는가? 성경에는 여덟 가지가 언급되어 있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 몸을 그분을 섬기기 위한 ‘산 제사’로 그분께 드려야 한다. 이는 마치 물질적 제사를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영적 예배’라고 불린다(롬 12:1). 아마도 그것이 마음의 예배를 표현할 때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인 듯하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찬양과 예배와 감사,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를 드린다. 우리의 세 번째 제사는 기도로서, 이는 향연과도 같이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네 번째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시고 결코 멸시치 아니하시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의 제사이다. 다섯 번째로, 믿음은 ‘제물과 봉사’라고 불린다. 여섯 번째로, 우리가 드리는 선물과 선행 역시 ‘제물과 봉사’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희생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로, 제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관제처럼 우리 삶을 죽음이 이르기까지 쏟아 붓는 것이며, 여덟 번째는 복음 전도자의 특별한 제사인데 복음 전도자는 그의 회심자들을 ‘하나님이 받으심직한 제물’로 드릴 수 있기 때문에 그의 복음 전파는 ‘제사장 직무’라고 불린다.

 

이 여덟 가지는 모두, 다니엘 워터랜드(Daniel Waterland)의 말을 빌면 ‘참되고 복음적인 제사’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율법이 아니라 복음에 속해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보이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반응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영적이며, 또한 ‘선한 생각이든, 선한 말이든, 아니면 선한 방법이든 모두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으로서 ‘고유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성찬식은 오직 그리스도의 제사를 기념하고 또한 우리가 그에 반응하는 포괄적인 제사를 드리는 기회라는 점에 의해서만 ‘제사’라고 불릴 수 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