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자기 긍정
자기를 부인하라는 예수님의 명시적인 명령 곁에는 자기를 긍정하라는(이는 이기적인 자기 사랑과는 전혀 다르다) 암시적인 명령이 있다.
첫째로,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라. 그분이 인가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하고 추한 것들에 주의를 집중시키신 것은 사실이다(막 7:21-23). 그러나 예수님은 또한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 존재가 갖고 있는 ‘가치’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인간은 새나 짐승들보다 ‘훨씬 더 귀하다’고 그분은 말씀하셨다. 이 가치 판단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이 구약에서 이어받은 창조의 교리, 즉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활동의 극치이며,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셨다는 교리였을 것이다.
둘째로,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보라. 그분은 아무도 경멸하지 않으셨으며, 아무도 거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분은 일부러 세상이 존경하지 않는 사람들을 존경하셨고, 세상이 거부한 사람들을 받아들이셨다. 그분은 대중 앞에서 여자에게 공손하게 말씀하셨다.
셋째로, 특별히 우리는 인간을 위한 예수님의 사명과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분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 대신 대속물로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인간을 위해 고난 받고 죽기로 결심하신 것보다 인간에 대해 그분이 부여하신 높은 가치를 더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은 없다. 그분은 단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구원하려고 역경에 맞서고 위험을 감수하는, 사막에 오신 선한 목자이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우리의 자아 또는 개인적 신원)은 부분적으로는 창조의 결과)하나님의 형상)이며 부분적으로는 타락의 결과(손상된 형상)이다. 우리가 부인하고 포기하며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는 자아는 우리의 타락한 자아, 곧 우리 안에 있는 바 예수 그리스도와 양립할 수 없는 모든 것이다(이런 범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고는 ”나를 좇을 것이니라“는 그분의 명령이 나온 것이다). 우리가 긍정하고 존중해야 할 자아는 우리의 창조된 자아, 곧 우리 안에 있는 바 예수 그리스도와 양립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여기에서, 만일 우리가 자기를 부인함으로 자기를 잃으면 자기를 찾으리라는 그분의 진술이 나온다). 참된 자기 부인(우리의 타락한 자아의 부인)은 자멸의 길이 아니라 자기 발견의 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단지 ‘창조된 그리고 타락된’ 존재로만 생각할 수 없으며, 그보다는 ‘창조된, 타락된, 그리고 구속된’ 존재들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요소의 도입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긍정하고 더 많은 것을 부정하게 해준다.
첫째로, 우리에게는 긍정할 것이 더 많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그 안에서 재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신약에서‘중생’, ‘부활’, ‘구속’ 등 여러 가지 말로 요사되어 있는) 본질적으로 재창조이다. 우리의 새로운 자아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았으며, 그것은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았다. 실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것은 우리의 지성, 우리의 성품, 우리의 관계들이 모두 새로워졌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성령의 전이다. 성령께서는 그분의 열매와 은사로 우리를 풍요롭게 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어느 날 나타난 영광을 고대하는 하나님의 후사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완전히 변화되는 체험이다. 우리를 변화시킴으로써 그것은 또한 우리의 자아상을 변화시킨다. 우리는 이제 긍정할 것을 더 많이 갖게 되었다. 자랑하는 믿음에서가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에서 긍정하는 것이다.
둘째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긍정할 것과 마찬가지로 부정할 것도 많다. 지금까지 나는 부정해야 하는 것에 우리의 타락성만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비록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거나 타락에 기인한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뜻을 행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을 부정할 것을 요구하신다. 바로 그 때문에 완전하고 타락하지 않은 인성을 지니고 있었던 예수님 역시 그분 자신을 부인하셔야 했던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고, 즉 이기적으로 즐기지 아니하셨다고 한다(빌 2:6). 그것은 이미 그분의 것이었다. 예수님은 그분을 비난하는 자들이 불평했던 것처럼 ‘자기를 하나님과 등등으로’ 삼지 않으셨다(요 5:18). 예수님은 영원히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그래서 그분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다(요 10:30).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신분이 주는 특권에 집착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 그분은 ‘자신을 비어’ 영광을 버리셨다. 그분이 그것을 버리신 이유는 그것이 그분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메시아와 중보자가 되는 운명을 수행하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자기를 부인함으로 십자가로 가셨다. 물론 그것은 그분이 마땅히 죽어야 할 어떤 행동을 하셨기 때문이 아니다. 성경에 따르면 이것이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고, 그 뜻에 예수님이 자발적으로 굴복하셨기 때문이다. 전 생애를 통해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하려는 유혹에 저항하셨다.
우리의 자기 이해에는 대단한 분별력이 필요하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자아’는 무엇인가?
나는 동시에 고상하기도 하고 비천하기도 하며, 아름답기도 하고 추하기도 하며,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며, 올바르기도 하고 비뚤어져 있기도 하며,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형사이면서도 때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 손아귀로부터 구원해 주신 바로 그 마귀에게 아부하며 충성을 맹세한다. 나의 참된 자아는 창조에 의해 된 나로서 그리스도께서 구속하러 오신 것이요 부르심에 의해 된 것이다. 나의 그릇된 자아는 타락에 의해 된 나로서 그리스도께서 멸망시키러 오신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구별한 다음에야 우리는 그 각각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참된 자아에 대해서는 충실해야 하고 그릇된 자아에 대해서는 충실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창조와 구속과 부르심에 의해 된 모든 것은 두려움 없이 긍정해야 하고, 타락에 의해 된 모든 것은 냉혹하게 거부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두 가지 태도를 우리에게 가르치는데, 한편으로 십자가는 우리의 참되 S자아의 가치를 측정하도록 하나님이 주신 척도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의 그릇된 자아를 부인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이 주신 본보기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럼으로써 그것을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좀 더 간단히 말해서, 십자가 앞에 설 때 우리는 동시에 우리의 하찮음과 우리의 무가치함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기까지 하신 그분의 사람의 크심과, 그분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우리의 큰 죄를 모두 깨닫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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