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정표/그리스도의 십자가

11-4. 섬김의 영역

JORC구원열차 2009. 11. 19. 23:56

11-4. 섬김의 영역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십자가의 공동체라면, 또한 그렇게 때문에 희생과 섬김과 고난으로 특징 지워진다고 한다면, 이는 가정, 교회, 세상이라는 세 영역에서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

 

그리스도인의 사정 생활은 어떤 경우에든 자연적인 인간의 사라이라는 특징을 띠어야 하며, 그것은 초자연적인 신적 사랑, 즉 십자가의 사라에 의해 더욱더 풍성해져야만 한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가족관계, 즉 남편과 아내간의, 부모와 자녀 간의, 형제자매 간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엡 5:21). 그리스도는 겸손하고 순종적인 사랑으로 주어져 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25-27절).

 

남편들에게 요구되는 바 자신을 주는 사랑의 특성은 훨씬 더 강력한 것이라는 점을 논의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신부인 교회를 사랑하셨던 것과 같은 사랑으로 자기 아내를 사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갈보리의 사랑이다. 그것은 자기희생적이며(그분은 ‘교회를...위하여 자신을 주셨다’, 25절) 동시에 건설적이다(‘거룩하게...하려’ 하시며, 영광스럽게 그녀의 잠재 가능성을 충분히 개발하도록 하는 것이다, 26-27절). 그것은 또한 돌보며 보호하는 것이다. “남편들도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같이 하나니”(28-29절).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 가정은,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부부관계는 그것이 십자가의 특징을 띠면 더욱더 안정되고 만족스러울 것이다.

 

우리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기적인 야망)과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한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야 한다. 왜 그런가? 왜 이렇게 이기적 야망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이타적 관심을 계발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바로 이것이 자기 자신의 권리를 버리고 자신을 낮춰 다른 사람을 섬기신 그리스도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사실 십자가는 교회 내에서 우리의 모든 관계를 유쾌하게 해준다.

 

만일 십자가가 가정과 교회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특징지어야만 한다면, 세상에서의 삶에서는 더욱더 그러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을 볼 때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분의 탄생은 그분이 우리의 인성과 동일시된 것으로, 우리에게 이와 유사하게 큰 희생을 치르고 사람들과 동일시될 것을 명하는 것이다. 그분의 죽음은 우리에게 교회 성장에 고난이 핵심이라는 것을(왜냐하면 씨가 죽어야만 열매를 맺기 때문에) 상기시켜 준다. 그리고 그분의 부활은 그분께 이제 ‘모든 권세’가 그분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도록 하는, 또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도록 그분의 교회를 보낼 수 있도록 하는 우주적 주권을 부여했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이렇게 기록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 4;12). 선교의 가장 중심부에는 십자가가 놓여 있다. 타문화권 선교사에게 이것은 값비싼 개인적, 가족적 희생, 경제적 안정과 직장에서의 승진의 포기,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과의 결속, 문화적 우월감에 대한 교만과 편견을 회개하는 일, 피선교국의 주권을 존중하면서 섬기는 겸허함(때로는 좌절) 등을 뜻할지라도 모른다. 이것들 각각은 일종의 죽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가져오는 죽음이다.

 

모든 복음 전도에는 또한 메워야 할 문화적 간격이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사자가 되기 위해 한 나라 또는 한 대륙에서 다른 나라 또는 다른 대륙으로 건너갈 때 분명히 나타난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대부분의 교회들이 이데 막 고찰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철저하고 큰 희생을 요하는 복음 전도를 명한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또한 사회적 행동을 명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본받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6-18).

 

요한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신을 주는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값진 소유물은 우리의 목숨이므로, 가장 큰 사랑은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에서 나타난다. 증오의 진수가 가인의 경우와 같이 살인이듯이, 사랑의 진수는 그리스도의 경우와 같이 자기희생이다. 살인은 다른 사람의 목숨을 취하는 것이고, 자기희생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최고의 사랑의 본보기를 보여 주는 것 이상을 행하셨다. 그분은 그분의 사랑을 우리 안에 넣어 주셨다. 우리에게 나타나고 또한 우리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사랑으로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하는, 이중적이고도 피할 수 없는 동기를 갖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요한은 다른 사람을 위해 우리 목숨을 버리는 것이 자신을 주는 것의 최고 형태이긴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님을 분명히 한다. 만일 누군가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을 ‘보고도’,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을 그가 ‘보는’ 것과 관련시키는 일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않는다면 그는 자기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랑은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집 없는 자에게 안식처를, 궁핍한 자에게 도움을, 외로운 자에게 우정을, 슬픈 자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다. 물론 항상 이러한 선물들이 자신을 주는 것의 표시라면 말이다. 왜냐하면 음식과 돈, 시간과 정력을 주면서도 여전히 자기 자신을 주는 것을 보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비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십자가에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거의 앞뒤를 헤아리지 않을 만큼 무모한 듯한 모습이 잇다. 그것은 우리의 차갑고 계산적인 사랑에 도전을 가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뿐만 아니라 그분의 공의를 나타낸다. 바로 그 때문에 십자가의 공동체는 사랑에 찬 자선 사업뿐 아니라 사회 정의에도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공격받고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 주시 위해 선한 사마리아인은 언제나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서 산적을 없애면 훨씬 더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