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악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로마서 12장과 13자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이다. 그것은 바울이 그의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적절히 반응하도록 탄원하는 것의 일부이다. 열한 장에 걸쳐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자기 이들을 죽음에 내주신 것과,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신 구원을 온전히 내려 주시는 것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를 펼쳐 보였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우리는 (1) 우리 몸을 하나님께 산제사로 드리며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그분의 뜻을 분별하고 행하여야 한다(롬 12:1-2). (2) 우쭐해하거나 자신을 멸시하지 말고 냉정한 판단력으로 우리 자신을 생각해야 한다(롬 12:3). (3) 우리의 은사를 서로를 섬기는 데 사용하면서, 조화와 겸손 가운데 함께 살아가며 서로 사랑해야 한다(롬 12:4-13,15-16). (4) 우리는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고 원수들에게 선을 행해야 한다(롬 12:14,17-21).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우리를 붙잡을 때, 우리의 모든 관계는 철저하게 변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우리 자신을 이해하며, 서로를 사랑하고, 원수를 섬긴다.
값없이 공로 없이 선물로 구원을 주는 십자가라는 거침돌, 인간의 이기심을 부끄럽게 하는 십자가의 사랑과 정결, 자기 사라의 여지를 남겨 놓지 않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우선적인 명령. 이것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에게 반대하게끔 만든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우리 주님과 그분의 복음에 대한 반대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로마서 12장의 배경이다.
사람들 중에는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들(14절),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17절), 심지어 우리의 ‘원수’라고 묘사될 수 있는 사람들(20절)이 있다. 우리는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들과 원수들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가장 밝게 빛나는 십자가는 우리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끼쳐야 하는가? 로마서 12장과 13장의 아래 나오는 부분에서 특별히 교훈적인 것은 선과 악에 대한 바울의 네 가지 언급이다.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롬 12:9, 14-13:7).
이 본문은 선과 악이라는 주제에 대한 자기 의식적인 묵상처럼 보인다. 여기에 그것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네 가지 암시가 있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롬 12:9).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 12:17).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롬 13:4).
특별히 이 구절들은 악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규정해 준다.
첫째, 악을 미워해야 한다. “사랑에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롬 12:9). 사랑과 미움을 이렇게 나란히 놓은 것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보통 우리는 그것들을 상호 배타적인 것으로 여긴다. 사랑은 미움을 쫓아 버리고 미움은 사랑을 쫓아 버린다. 하지만 진리는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사랑에 ‘거짓이 없을’ 때(문자적으로는 ‘위선이 없을’ 때)는 언제나 그것은 도덕적으로 분별력이 있다. 악과 타협하는 것은 사랑과 양립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이 거룩한 사라이기 때문에 악을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악을 미워해야만 한다.
둘째, 악을 되갚아서는 안 된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롬 12:17,19). 원수 갚는 일과 보복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절대적으로 금해져 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한 가지 악에다 다른 악을 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악을 미워한다면 어떻게 거기에 또 다른 악을 더할 수 있단 말인가? 산상수훈은 여기에 나와 있는 말을 분명하게 반영하고 있다.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즉 전후 문맥을 보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은 “보복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완벽한 본보기를 보여 주셨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기’ 때문이다(벧전 2:23). 대신에 우리는 ‘선한 일을 도모’(롬 12:17)해야 하며, ‘모든 사람들로 더불어 평화’(롬 12:18)해야 한다. 즉 악이 아니라 선, 폭력이 아니라 평화가 우리 삶의 특징이 되어야만 한다.
셋째, 악을 이겨야 한다. 악을 미워하는 것과 악을 갚는 것을 거절하는 것은 별개이다. 훨씬 더 좋은 것은 그 악을 정복하거나 이기는 것이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바울은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롬 12:14). 또한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롬 12:20)우리는 사람들을 축복함으로 그들의 유익을 바라야 하고, 그들을 섬김으로써 그들을 선대해야 한다. 예수님의 새로운 공동체에서는 저주는 축복으로, 원한은 기도로, 복수는 섬김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사실 기도는 원한에 찬 마음을 깨끗하게 한다. 축복하는 입술은 동시에 저주를 할 수 없다. 그리고 섬김에 전념하고 있는 손은 복수를 할 수 없다. 원수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것과는 양립할 수 없는 적의에 찬 행동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대단한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다. 그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창피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회개하여 ‘선으로 악을 이기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의 비극은 그럼으로써 우리가 악에 악을 더하며 따라서 이 세상의 악의 총계를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악을 선으로 바꾸는 유일한 비법이다.
넷째, 악은 처벌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악에 대한 앞의 세 가지 태도들에서 멈춘다면, 우리는 성경을 매우 취사선택하여 사용하게 되고 따라서 균형을 잃는 죄를 범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계속해서 국가가 악을 처벌할 것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직접 원수를 갚지 말라는 말과, 하나님이 원수를 갚으시리라는 말을 듣게 된다(롬 12:19). 또한 우리는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말과, 하나님이 갚아 주시리라는 말을 듣게 된다(롬 12:17,19). 따라서 복수와 원수 갚는 일은 먼저 우리에게는 금지되고 다음에 하나님께 돌려진다. 그것은 앞뒤가 안 맞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금지되는 이유는 악이 처벌받을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그것은 처벌받을 만한 것이며 또 처벌받아야만 한다) 처벌이 우리의 특권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악을 어떻게 처벌하시는가? 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한 그분의 진노는 어떻게 표현되는가? 즉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마지막 심판’이라는 대답인데, 그것은 물론 옳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지노’를 자신에게 ‘쌓는다’(롬 2:5). 하지만 우리는 그때까지 가다려야만 하는가? 악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가 지금 나타나는 다른 방도는 없는가? 바울에 따르면 그런 방도는 있다. 첫 번째는 신앙심 없는 시회가 점진적으로 타락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그로써 하나님은, 하나님과 선에 대한 자가들의 지식을 의도적으로 묵살해 버리는 자들의 마음과 행동을 통제되지 않은 타락에 ‘내어버려 두셨다’(롬 1:18-32). 그것은 하나님의 지노의 결과이다. 두 번째는 국가의 재판 과정을 통해서이다. 왜냐하면 법을 시행하는 관리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지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이기 때문이다(롬 13:4).
바울이 로마서 12장 끝과 로마서 13장 초두에서 같은 어휘를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진노’(올게, ojrghv)라는 단어와 ‘복수/처벌’(에크디케시스,ejkdivkhsi"와 에크디코스,e[kdiko")이라는 단어가 양쪽에서 모두 나타난다. 복수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금지되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사자들’ 즉 국가의 관리들에게 부과되어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서 그들이 깨닫는 것이 윤리적 ‘이원론’이라는 점에 대해 대단한 어려움을 느낀다.
첫째, 바울은 루터의 유명한 두 왕국 교리, 즉 하나님의 오른손 왕국(교회)은 복음의 능력을 통해 행사되는 영적 책임을 갖고 있고 그분의 왼손 왕국(국가)은 검의 능력을 통해 행사되는 정치적 또는 세속적 책임을 갖고 있다는 교리처럼, 교회와 국가라는 두 가지 실재 사이를 구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둘째, 바울은 그리스도인 행도의 두 가지 영역, 곧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 간을 구분하여 우리가 사적으로는 원수를 사랑해야 하지만 공적으로는 그들을 미워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이라는 이중적인 도덕 기준 개념은 단호히 거부되어야 한다. 기독교 도덕은 오직 하나가 있을 뿐이다.
셋째, 바울이 구분하고 있는 것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이라는 두 가지 역할 사이의 구분이다. 그리스도인은 교회에서나 국가에서나,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언제나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동일한 도덕적 권위 하에 있지만, 서로 다른 역할들(가정에서, 일터에서, 사회에서)을 부여받는데, 이로 인해 각 역할 에 따라 서로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이 타당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재판관으로서 죄수에게 형을 선고할 수는 있지만, 반면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로마서 12장과 13장에서 악을 갚지 않는 것과 악을 처벌하는 것을 이런 식으로 구분하고 있다. 12장 끝에 나온 금지는 심판의 날까지 악을 처벌하지 않은 채 남겨 두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처벌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행자로서의 국가에 의해 시행되어야 하며 일반 시민들이 법을 스스로 시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뜻이다.
보복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악은 처벌되어 마땅하고 반드시 처벌되어야 하며, 또한 실상 처벌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자신은 “인자가...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 16:27; 여기에 나온 동사는 롬 12:19에 나온 것과 유사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이 원수 갚는 일 대신에 하신 행동이 무엇이었는가? “오직 동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셨다”(벧전 2:23). 바울의 말로 하면 예수님은 그것을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셨다. 예수님이 자신을 처형하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실 때나, 우리의 구원을 위해 거룩한 사랑으로 그분 자신을 주실 때도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필요성이 예수님의 마음속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예수님은 바로 그 순간에 오직 정당한 처벌을 그분 자신이 감당함으로써 악을 이기고 계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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