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정표/그리스도의 십자가

제12장-원수를 사랑하는 것 / 12-1. 화목과 징계

JORC구원열차 2009. 11. 22. 00:32

제 12 장

원수를 사랑하는 것

 

‘십자가 아래 사는 것’은 기독교 공동체 생황의 모든 측면이 십자가에 의해 모양이 지어지고 특색이 부여된다는 뜻이다. 십자가는 우리의 예배를 이끌어내고, 그래서 우리가 계속적으로 성찬식의 경축함을 즐기도록 하고, 또 균형 잡힌 자아상을 개발할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가 자신을 이해하며 동시에 우리 자신을 주는 법을 배우도록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원수를 포함한 다른 사람과 관련된 우리의 행동을 지도해 준다. 우리는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셨기’ 때문이다(엡 5:1-2). 그뿐 아니라 우리는 우리가 맺는 관계들을 통하여 십자가에서의 하나님의 지혜를 특징짓는 그 사랑과 공의의 결합을 나타내야 한다.

 

12-1. 화목과 징계

 

그리스도인들은 화평케 하는 자가 되도록(마 5:9), 그리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도록’(벧전 3:11) 부르심을 받는다. 동시에, 화평케 하는 것은 결코 일방적인 것이 될 수 없음도 부인할 수 없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는 명령은 ‘할 수 있거든’과 ‘너희로서는’이라는 조건절의 한정을 받는다(롬 12:8).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우리와 화평하게 지내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그와 화평하게 지내기가 불가능한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의 대답은 팔복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단언하시면서 예수님은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딸)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화평케 하는 일이 하나님 아버지의 본을 따라 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즉시 그것이 화를 가라앉히는 것과는 매우 다른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장해 주시는 화평은 결코 값싸지 않은, 항상 값비싼 화평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실로 이 세상을 화평케 하는 탁월한 분이시지만, 그분께 대항해 반항하는 ‘원수들’인 우리와 화목하시로 결심하셨을 때 그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던’ 것이다(골 1:20). 하나님 자신을 우리와, 또 우리를 그분 자신과, 그리고 유대인, 이방인, 다른 적대적 집단들을 서로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 그분은 바로 십자가에 고통스러운 수치를 당하셔야만 했다.

 

우리는 회개하지 않았는데도 너무 서둘러 용서해 줌으로써 용서를 값싸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그러고 나서야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눅 17:3).

 

화평케 하는 것의 동기는 사랑이다. 용서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은 둘 다 큰 희생을 요하는 훈련이다. 사랑은 어린아이가 정서적으로 성숙하게 자라나는 데 있어 필수 불가결한 환경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린아이를 망쳐 놓는 부드럽기만 하고 아무 원칙도 없는 그런 것이 아니라, 대가가 어떠하든지 간에 자녀들의 최상의 안녕을 추구하는 ‘거룩한 사랑’이다. 실로 인간의 부성(父性)이라는 개념 자체가 하나님의 영원한 부성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므로(엡 3:14-15), 그리스도인 부모는 자연힌 하나님의 사랑을 모방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참된 부모의 사랑은 징계를 배제하지 않는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 때문이다. 실로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의 아들과 딸로 취급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를 징계하실 그때이다. 만일 그분이 우리를 징계하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참 아들이 아니라 사생아임을 보여 주는 것이 된다(히 12:5-8). 참된 사랑은 또한 분노한다. 곧 자녀들 안에 있는 바 그들의 최고 선에 해로운 모든 것에 대적한다. 자비 없는 정의는 너무 관대하다. 더구나 자녀들은 이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그들은 양자에 대한 일을 행한다면, 그들은 또한 자신이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도 알며 그 벌을 기대하고 또 받고 싶어한다. 그들은 또한 그 벌이 사랑 없이 행해지거나 정의에 어긋나게 시행되면 즉시 그것을 알아차린다. 어린아이가 부르짖는 가장 가슴에 사무치는 외침은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라는 것과 “그건 공정하지 않아”라는 것이다. 사랑과 저의에 대한 그들의 감각은 하나님, 곧 그들을 그분의 형상으로 만드시고 십자가에서 자신을 거룩한 사랑으로 드러내 보이신 그분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인간 가정의 경우에 적용되는 원리가 교회 가족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신약 성경은 징계에 대해 분명한 교훈을 준다. 한편으로 그것이 교회의 거룩함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건설적인 목적, 즉 가능하다면 범죄한 교인을 ‘얻고’ ‘바로잡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도 징계의 목적은 당사자를 소원하게 만들거나 굴욕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선도하는 데 있음을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분은 단계별로 행할 수 있는 절차를 규정하셨다. 첫 번째 단계는 죄를 범한 사람과 사적으로 일 대 일로 대면하는 것이다. 그 도안에 그가 들으면 그를 얻게 될 것이다. 만일 그가 거부하면 두 번째 단계는 책망한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다른 여러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것이다. 그래도 그가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해서 그가 세 번째로 회개할 기회를 갖도록 해야 한다. 만일 그가 여전히 완강하게 들으려 하지 않거든 그때 가서야 그를 출교시켜야 한다(마 18:15-17).

 

바울의 가르침도 비슷했다. 어떤 교인이 ‘범죄한 일이 드러나면’ 그를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이것은 서로의 짐을 져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갈 6:12). 심지어 ‘사단에게 내준 것’(아마도 이 말로써 바울은 극악한 범죄자를 출교시킨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도 긍정적인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훼방하지’ 못하게 하거나(딤전 1:20), 적어도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고전 5:5)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모든 진계 행위는 십자가의 사랑과 정의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국가는 폭력을 사용할 수 있는가? 아니면 이것은 십자가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 물론 십자가는 그 자체가 정의에 대한 엄청난 침해와 잔인한 사형집행을 포함하는 현저한 폭력 행위였다. 그러나 그것은 부당하게 유죄를 선고받고, 고문당하며, 보복하기는커녕, 아무 저항 없이 처형당하신 예수님에 의해 행해진, 마찬가지로 현저한 비폭력 행위였다. 더구나 그분의 행들은 신약 성경에서 우리의 본보기라고 설명되어 있다.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리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0-21). 그러나 이 본문은 많은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모든 폭력을 비폭력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십자가는 형사 재판 과정과 소위 말하는 ‘의로운 전쟁’(just war)을 무효로 만드는 것인가? 그것은 모든 종류의 폭력의 사용을 금하는가?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군인이나 정치가 혹은 치안 판사가 감옥의 관리가 될 수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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