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구원의 이정표/장별요약강해-신약

[눅 6장] 예수의 가르치심

by JORC구원열차 2014. 9. 30.

[눅 6장] 예수의 가르치심

 

[내용개요]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보고 안식일을 범했다고 정죄했으나, 예수께서는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임을 분명하게 선언하셨다(1-5절).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서 손 마른 자를 고쳐 주셨는데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정죄했으나,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말씀하셨다(6-11절).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기도하신 후에 열두 제자를 세우셨다(12-19절). 그 후에 평지에 서셔서 여러 가지 교훈들을 들려주셨다(20-49절).

[강 해]

 

예수께서는 말씀을 듣기 원하는 자들에게 하늘나라의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신앙인들의 바른 삶의 모습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말씀은 교훈과 삶의 방식으로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으로 응답할 것은 우리가 담대히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시는 예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생명이 이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1. 능력을 가타내시는 예수

 

1) 안식일의 주인

예수께서 가르침을 시작하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으로서 우리가 걸어가야 할 생명과 진리의 길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깨닫지 못했던 진리를 일깨워 주십니다. 안식일이 인간을 속박하는 제도로 전락한 것을 보시고 안식일의 진정한 주인은 메시야이시며, 안식일은 우리를 위한 것이며 은혜를 베푸신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 주셨습니다. 안식일은 인간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념하는 날이며 하나님의 창조를 기념하는 날이기에 우리들은 안식일에 즐거워하며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우리의 짐이 되는 것은 결코 옳지 않은 것입니다.

 

a.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함(창2:2-3).

b. 하나님의 구원을 기념함(신5:12-l5).

 

2) 안식일에 행할 것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에 생명을 구하는 일이 행해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제도를 지키기 위해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안식일에는 의를 행해야 하며 생명을 구하는 일을 행해야 합니다. 예수의 구원의 복된 소식은 이날에 더욱 전해져야 하며 구원의 일들이 활발히 행해져야 합니다. 우리에게 안식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베푸실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열심을 다해 생명을 구하는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a. 주님을 위한 날임을 명심할 것(롬14:5-6).

b. 영원한 안식을 바라라(히4:9-11).

 

3) 예수께서 능력으로 행하심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의 행하시는 일을 보고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들 중에는 육신의 질병으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의 고쳐 주심을 바라며 그의 앞에 나온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예수는 치유의 이적을 행하십니다. 그들이 고난받는 상황에서 해방되는 것은 오직 예수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능력을 행하시는 것은 불쌍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사랑이 우리를 질병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a. 그리스도의 능력(고전1:24).

b. 능력의 근원인 여호와(엡1:19).

 

2. 평지 설교

 

1) 제자들을 가르치심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진정한 의미의 행복을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행복에 대해서 예수께서 바르게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로서 그의 가르침을 받고 그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은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참 행복을 베풀어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많은 것을 잃고 불행한 사람처럼 보일지라도 예수께서 인정하시고 사랑하시는 자들은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져 있으며 진정한 안식이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위해서 작은 것을 잃고 그 후에 더 많은 것으로 채워진다는 사실을 알고 그와 함께 살아가며 그의 말씀에 따르는 사람에게 이러한 복이 주어질 것입니다.

 

a. 주의 도를 가르침(시25:4-5).

b. 영적인 진리를 가르침(히8:11).

 

2) 사랑의 법

예수께서 가르치신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그가 말씀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이 알 수 있도록 그 의미와 참 뜻을 밝히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 동안 지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주신 말씀은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서로을 사랑하는 것이 바른 삶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과 또 다른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을 생각한다면 이 말씀을 지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를 생각하고 우리도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바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a. 이웃을 사랑하라(레19:18).

b. 서로 사랑하라(요13:35).

 

3. 삶의 교훈을 주심

 

1) 비판하지 말라

사람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헐뜯고 중상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상대방을 깎아내려서 자기가 높아지려는 나쁜 마음입니다. 이것을 이기려면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생각하고 위해 줄 수 있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비판하기에 앞서 그를 용서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있다면 진정으로 자신이 높아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용서하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들도 그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선으로 보답이 돌아올 것입니다.

 

a. 누명 씌우기 위함(신22:14).

b. 중상하기 위함(시101:5).

 

2) 나무는 그 열매로 알 수 있음

나무를 구분하는 것은 그 열매가 무엇인지를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사과를 맺는 나무는 사과나무입니다. 복숭아를 맺는 나무는 복숭아나무입니다. 이렇듯 열매는 그 나무를 구분하게 하는 기준이 됩니다.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은 그 사람의 용모가 아니라 그가 행하는 일입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악인이요, 선을 행하는 사람은 의인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행실이 그 사람의 본질을 보여 주는 것임을 알게 합니다. 사람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다면 그의 행실은 악한 것입니다. 반면에 그 마음에 선이 가득한 사람은 선한 일을 행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고 악을 버리며 선을 취해야 할 것입니다.

 

a. 선한 열매(약3:17).

b. 정의의 열매(암6:12).

 

3) 반석 위에 지은 집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그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인간의 죄악된 속성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에 선한 것을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그에게서 이제 선한 행실이 계속되어질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치 않는 사람은 마음이 악한 그대로 방치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서는 악한 행실이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만이 구원의 기쁨과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a.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한 생활(빌1:27).

b. 정직히 행함(약3:13).

 

결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 것은 인간의 죄악된 속성을 벗어 버리고 영원한 생명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말씀에 복종시키고 말씀이 지시하는 것에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선한 행실에 따른 상급이 주어집니다.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은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보장하신 것이며,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상급입니다. 이것을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단어해설]

 

1절. 비비어 먹으니.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금하는 일 즉 곡식을 타작하는 행위로 간주한 것이다.

3절. 읽지 못하였느냐.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의무에 대한 책임을 묻는 말이다.

4절. 진설병. 이 떡은 성소의 상 위에 두 줄로 놓여져 있다. 진설병은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헌신을 상징한다.

5절. 안식일의 주인. 이것은 안식일의 제정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낸다.

7절. 서기관과 바리새인. 이들은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율법 학사로서 구약의 제사장 계층에서 연유되었다. 이들의 의식은 다분히 율법적인 것이어서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과 행위를 판단하기만 했으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10절. 회복된지라. 원어적으로는 이전과 같은 상태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행위는 율법을 어기신 것이 아니라 율법의 참된 의미를 되찾으신 것이다.

15절. 도마. 원어적으로는 '쌍둥이'라는 의미이다. 도마는 예수의 제자 중에서 빌립과 같이 상당히 이성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18절. 더러운. 원어적으로는 '악한'이라는 의미이다.

21절. 우는 자. 원어적으로는 '통곡하다, 애통하다'를 뜻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죄에 대한 자복의 의미가 강하다.

23절. 기뻐하고 뛰놀라. 이 말은 고난 이후에 받게 될 영원한 축복을 바라보면서 감사하라는 의미이다.

24절. 부요한 자. 물질을 많이 소유하거나 그로 인하여 영적으로 교만해진 사람을 말한다.

34절. 의수히. '의도적으로'라는 뜻이다.

35절. 지극히 높으신 이.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지칭할 때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37절. 비판치 말라. 원어적인 의미로는 상대를 죄인으로 취급하거나 나쁜 의도로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43절. 열매. 행위에 따르는 당연한 결과를 말한다.

45절. 쌓은 선. 이것은 선을 이루려는 인간적인 노력보다 하나님과의 긴밀한 만남을 의도하는 말이다.

 

[신학주제] - 평지수훈.

 

예수께서 제2차 갈릴리 사역에 앞서서 제자들을 세우시고 말씀을 가르치시는 내용이다. 마5-7장의 산상수훈과 비슷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태는 예수께서 산 위에서 설교하신 것으로 기록했으나, 누가는 평지에서 설교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마태는 예수의 설교들을 한 곳에 묶어 두었으나, 누가는 예수의 설교들을 분산시켜 놓았다(참조, 눅11,눅13,눅14,눅16장). 이 같은 차이점들로 볼 때 예수께서는 동일한 설교를 여러 곳에서 여러 번 하신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 지방에서는 산 위에서 행하셨던 설교를 저 지방에서는 평지에서 행하신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마태는 그러한 예수의 설교를 한 군데로 모았고, 누가는 가급적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기록하려고 했던 것 같다. 한편, 마태의 팔복 설교와 누가의 사복 설교는 비교할 만한 가치가 있다. 마태는 복에 대해서만 말했고 저주에 대해서는 언급지 않았으나, 누가는 네 가지 복과 그에 대응하는 네 가지 화를 언급했다. 이것은 마태의 산상수훈이 선언적인 반면에 누가의 평지수훈이 경고적임을 은연중에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마태의 팔복은 영적인 면에 치중하고 있으나 누가의 사복과 사화는 물질적인 면을 강조한다. 비교해 보면, 마태가 심령이 가난한 자, 의에 주린 자라고 표현한 부분을 누가는 영적인 차원에서 묘사하지 않고 그냥 가난한 자와 주린 자로 묘사했다. 누가의 표현을 영적인 해석보다는 단순히 표현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한 이유는 사복에 뒤따르는 사화의 언급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누가는 부요하고 배부른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만약 누가가 말한 가난한 자가 심령이 가난한 자이고 주린 자가 의에 주린 자라면, 부요한 자는 심령이 부요한 자가 되고 배부른 자는 의에 배부른 자가 되는데,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아무래도 억지로 끼워 맞추는 해석이 되고 만다. 결국 마태의 심령이 가난한 자와 누가의 가난한 자는 상호 보완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영적교훈]

 

이 뺨을 맞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고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까지 내어 주라는 예수의 말씀은 매우 혁명적이다. 이것은 폭력과 불의 앞에서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하라는 말이 아니다. 폭력을 폭력으로 맞서지 말고 불의를 불의로 맞서지 말라는 뜻이고, 오히려 비폭력적으로 저항하라는 뜻이다. 이 뺨을 맞았을 때 저 뺨마저 돌려 댐으로써 가해자의 마음을 정복하여 도저히 다른 뺨을 때릴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하여 승리하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