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5장]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증거
[내용개요]
본장은 35년 된 병자를 고치신 표적과 예수 자신의 신성에 대한 강화로서, 본서 전체에 일관되게 부각되어 있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제가 강조되어 있다. 특별히 본장에서는 예수 사역의 공간적 배경이 급작스럽게 예루살렘으로 바뀌었다. 공관복음에서는 본장과 전장 사이에 발생한 갈릴리에서의 예수의 여러 행적이 소상히 언급되어 있지만, 본서는 이 모든 이야기를 과감히 생략한 채 곧바로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예수의 사역을 기록하고 있다. 즉 요한은 갈릴리에서의 사역보다 예루살렘에서의 사역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이와 같은 비약을 사용한 것이다. 이러한 본장은 세번째 표적으로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1-9절), 유대인의 핍박 고조(10-18절), 아들의 권한(19-21절), 심판하는 권세(22-30절), 예수에 대한 증거(31-39절), 예수 거부에 대한 경책(40-47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수는 본장에서부터 줄곧 유대인들과의 논쟁 속에서 예수 자신의 신성을 증거하고 계신다.
[강 해]
예수께서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시자 유다인들은 안식일을 범했다고 예수께 시비하였습니다. 그때에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께 권한을 위임받아 구원과 심판을 이루심을 교훈하시며, 유다인들의 외식과 불신앙에 대해 책망하시며 정죄하셨습니다. 예수의 행하신 표적은 그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증거였던 것입니다.
1. 베데스다 못 가의 병자 치유
1) 삼십팔 년 된 병자 치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 베데스다 못 가에는 많은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 곳에 있는 이유는 천사가 못에 가끔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할 때에 물이 동한 후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의 병이 낫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에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예수께 병 낫기를 구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 병자에게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시자 그 병자는 곧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그 사람은 스스로 자기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서 물이 동할 때 물 속에 들어갈 수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의 말씀으로 그의 병은 깨끗하게 나았던 것입니다.
a.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일(막2:11-12)
b. 그리스도께서 낫게 하심(행9:34)
2) 병 나은 자의 예수 증거
38년 된 병자가 나음을 입어 자리를 들고 걸어가자 유다인들이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것은 안식일에 노동을 금하는 율법에 의해 자리를 들고 걷는 것이 범죄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사람에게 누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미 몸을 피하셨고 그 곳에 사람이 많았으므로 병 나은 자는 예수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셔서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셨고, 고침받은 자는 그가 바로 예수인 줄 알고 유다인들에게 가서 자신을 고친 이가 예수임을 증거하였습니다.
a. 자신의 의를 나타내려는 외식자(롬10:2-3)
b. 예수의 소문이 퍼짐(마9:31)
3) 예수에 대해 적개심을 품는 유다인들
유다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을 범한다고 하여 예수를 핍박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시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셨습니다. 그러자 이로 인해 유다인들은 예수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는데, 이는 예수께서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되이 여기심으로 신성 모독죄를 범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a.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된 유대인들(살전2:15)
b. 예수를 죽이려 함(눅6:11)
2. 아버지께서 부여하신 아들의 권한
1) 아버지의 행한 일을 아들이 행함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반발하는 유다인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다시 한번 강조하셨습니다. 자신이 행하는 이적과 기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본 아들이 행하는 일이며,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어 그와 같은 큰 일을 아들로 행하게 하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신 것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에서 병자를 고치신 일이 하나님의 일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이 불법이 아니요,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행한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a. 아버지께서 명하신 것을 말함(요12:49)
b.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따름(빌2:8)
c.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 (요11:43-44)
2) 심판의 권세를 부여받은 아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모든 자에 대한 심판권을 아들인 자신에게 맡기셨음을 밝히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는 곧 예수를 믿는 자는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구원을 받아 마지막 날에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는 자신에게 생명이 있음을 스스로 증거하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자신이 심판의 권세를 가지고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을 부르실 때에 예수를 믿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오고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됨을 증거하셨습니다.
a.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은 아들(요17:2)
b. 모든 자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됨(고후5:10)
c. 그리스도를 믿어 생명에 이름(요20:31)
3.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증거
1) 아들을 위한 아버지의 증거
예수께서는 자신이 심판을 행하심에 있어서 아무 것도 스스로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하심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심판은 의로우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이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에 대하여 증거하였으나 더 큰 증거는 하나님의 증거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예수에 대한 증거가 바로 예수께서 행하시는 초자연적인 역사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는 등의 표적은 예수가 하나님께로서 보냄을 받은 메시야이심에 대한 증거로서의 의미를 지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보내신 아들에 대한 최대의 증거는 예수를 무덤에서 다시 살리신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행하신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유다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의 죄를 범한 것이었습니다.
a. 예수를 믿을 만한 증거를 주심(행17:31)
b. 성부의 그리스도 증거(마17:5)
c. 보내신 자의 증거 (요8:17-18)
2) 아들에 대한 성경의 증거
예수께서는 성경이 곧 자신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에 영생이 있는 줄 알고 성경을 상고했지만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를 배척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유대인들의 불신앙에 대해 책망하시면서 그들이 스스로 영광을 취하려는 교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음을 정죄하셨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킨다고 하여 예수의 사역을 정죄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의 율법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써 그 중심으로 율법을 믿지 않음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즉 그들은 외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열심을 보이는 것 같았지만 그 중심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 신앙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 속에는 오직 육체의 정욕을 좇는 더러운 것들만이 가득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그들의 외식에 대해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외식적인 거짓 신앙은 결국 빛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나타났습니다.
a. 아들에 대한 약속의 기록(롬1:2)
b.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는 생명(딤후3:15)
c. 모든 성경이 그리스도를 가리킴(눅24:44)
결론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심으로써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였고 하나님과 성경이 예수의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였으나 유대인들은 그 사실을 인정치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치 않고 어두움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기 위해서 언제나 선한 양심을 소유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할 때 성령의 지혜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단어해설]
2절. 양문.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벽 을 중건할 때 동북편에 건축한 문으로(참조,느3:1), 제물로 쓰여질 양들이 드나들거나 그 문 옆에 양 시장이 있어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10절. 안식일. 안식일은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로서 무슨 일이든지 금하였다.
16절. 핍박하게 된지라. '핍박하게'라는 동사 <ejdivwkon:에디오콘>은 '철저히 추적하다, 몰아 수렁에 빠뜨리다'라는 뜻으로 유대 교권자들이 마치 사냥꾼이 사냥감을 추적하듯이 집요하고 지속적으로 예수를 괴롭힘을 가리킨다.
18절.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는 안식일을 범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하여 하나님을 모독한 죄를 범하였는데 이 두 가지은 돌로 쳐 죽이기로 규정된 것들이다(참조,레34:11-16민15:32-36).
20절. 더 큰 일. 앞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것보다 다음 절에 제시되는 죽은 자들을 일으키는 기적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육체는 물론 영혼의 생명까지 부여하시는 분이다.
27절. 심판하는 권세. 인자란 칭호로 그리스도의 대속적 메시야 사역을 부각시킴과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와 영광을 지니셨음을 나타낸다.
31절. 증거. 율법에서 자기주장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2-3명 이상의 성실한 증인의 증언이 요구되었다(참조,민35:30,신17:6).
35절. 비취는 등불. 등불 <luvcno":뤼노스>은 빛 <fw'":포스>(참조,요1:5) 과는 다르다. 태양빛이 비췰 때 등불은 흡수되고 무용지물이 되듯 참 빛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요한은 등불에 불과했다. 이는 요한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자신은 쇠하여야 하고 그리스도는 흥하여야 한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
36절. 더 큰 증거. 빛과 등불의 원리에서처럼 요한의 증거보다 예수의 증거는 비교할 수 없이 큼을 나타낸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에 불과하나 그리스도는 영원한 진리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39절.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여기서의 성경은 구약을 가리키며 유대인들은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행하는 데 열심을 내었다. 그러나 문제가 된 것은 율법의 외형적 준수에만 몰두하였기 때문이다.
43절.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은 거짓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그들은 자기 이름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영적으로 우둔자들을 넘어지게 하는 자들이다.
[신학주제] - 안식일 논쟁.
본장에서는 예수께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쳤다는 사실을 들어 유대인들이 예수께 논쟁을 걸어온다. 본장에 부각된 안식일 논쟁은 본서 가운데 등장하는 여러 논쟁들 가운데 최초의 것이라는 의의를 갖고 있다.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의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는 자들이었지만, 그릇된 율법관을 가지고 있었다. 율법의 엄격한 준수에 지나친 열심을 가진 나머지 그들은 율법을 일상생활 하나하나에까지 그대로 적용할 수 있도록 '하지 말라'는 부정적 명령 365개조와 '하라'는 긍정적 명령 248개 조항으로 구분하여 도합 613개 조항의 세부적 율법 세칙을 마련할 정도였다. 그래서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될 것들에 대한 조항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그들의 율법 해석은 잘못된 것이었다. 안식일은 진정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본문의 사건을 통하여 이처럼 인간의 마음을 굳게 하며 자신도 지키기 어려운 전통주의와 형식주의적 사고방식을 경계하셨고 무엇보다도 율법의 이면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요구, 즉 사랑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셨다. 원래 율법의 의미는 인간의 삶을 속박하고 죄로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의 삶을 하나님의 뜻을 통하여 평화와 평등의 삶으로 바꾸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율법의 실천은 굴레나 정죄가 아니라 사랑과 구제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삶으로의 인도에 있는 것이다.
[영적교훈]
인간이 만든 전통이나 제도 등이 만일 하나님의 진리에 위배된다면 이에 대한 교정이 필요하다. 인간의 외적 제도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율법의 참된 의도에서 벗어난 인습적 제도들의 해로운 영향력은 실로 독소적이라 할 수 있다. 교회의 연합과 성도간의 연합과 협력에 강력한 장애물을 형성하는 그런 것들에 대한 유일한 교정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적 사역과 말씀을 좇아 행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삶의 유일한 지표는 오직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삶의 모습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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