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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구약의 제사법/성막 · 구약의 제사법

성막과 그리스도 - 07. 성소와 지성소

by JORC구원열차 2009. 1. 14.

 

성막과 그리스도
 
차례
 
01. 성막에 대한 서론적 이해
02. 성막의 명칭들
03. 성막의 위치와 건축 및 재료
04. 성막뜰의 울타리와 출입문
05. 번제단
06. 물두멍
☞ 07. 성소와 지성소
08. 성소로 들어가는 문
09. 진설병상
10. 순금등대
11. 향단
12. 지성소의 기구들
13. 지성소의 휘장
14. 경건의 시간의 위한 제언
 
 
 
제7장 - 성소와 지성소
 
1. 성막 건물의 구조
 
성막뜰은 길이 45.6m, 넓이가 22.8m 였던 반면, 그 곳에서 있던 장막으로 된 건물, 곧 성소와 지성소는 단지 길이가 13.5m, 넓이가 4.5m, 높이가 4.5m되는 조그마한 것이었다.
 
성막의 첫 번째 방은 성소라고 불리는 공간이었다. 그 크기는 길이가 9.1m, 넓이가 4.5m, 높이가 4.5m였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지는 장소인 그곳에는 세 종류의 기구가 놓여 있었다. 빛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순금등잔, 생명의 떡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진설병상,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로서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향단이 그것이다.
 
성막 건물의 두 번째 방은 지성소였다. 그 방은 넓이 4.5m, 길이 4.5m, 높이 4.5m되는 정육면체의 공간이었다. 그곳은 특별한 예배의 장소로서 언약궤가 놓여져 있던 곳이다. 언약궤 위에는 속죄소가 있었다.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셨던 율법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언약궤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요구되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기준을 상징한다. 그 기준은 이간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이며, 단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충족되어질 수 있다.
 
언약궤 위의 속죄소는 대속제물의 흐르는 피에 근거해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상징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물의 피를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히 10:19-20).
 
이 건물의 서쪽, 남쪽, 북쪽은 순금으로 덧입혀진 딱딱한 나무벽으로 막혀 있었다. 이것은 완전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을 지니셨던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한다.
 
건물의 동쪽은 성소로부터 들어올 수 있는 휘장으로 가려져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 분을 경배하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휘장이 되어 주시는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한다.
 
또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도 다른 휘장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마 27:51).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로 나오는 자는 누구든지 그분께로 가까이 갈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예수께서 상하심으로 우리가 그 분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된 것이다(히 10:19-20).
 
성막 건물의 동쪽을 제외한 서쪽, 남쪽, 북쪽의 벽과 지붕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지어졌다. 이 벽과 지붕은 우리 안에 거하셔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보혜사이신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한다.
 
2. 성막 건물의 기초
 
성막 건물은 은으로 된 기초 위에 세워졌다. 이것 역시 각 성도의 생활의 기반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바울은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각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라고 말했다.
 
성막 건물은 광야의 모래 바닥이 아닌 굳은 땅에 터를 잡아야 했다. 출 30:11-16에는 이십세 이상 된 남자들로부터 은을 걷었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따랄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의 생명의 속전이었다. 전쟁이 일어났거나, 봉사의 일이 있을 대, 또는 상속받을 때에는 각 부족의 남자들의 수를 세어 그 수만큼 세금을 내게 했는데, 그 때 내는 돈을 속전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죄의 저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내는 돈은 속전이라고 부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죄를 속할 수 있는 것은 단지 피 흘림에 의해서 뿐이었기 때문이다. 성경의 많은 부분은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레 17:11은 말한다.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히브리서 9:22도 말한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리고 벧전 1:18-19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인구조사 중에 걷은 돈을 어떻게 속전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그 다음은 출 30:12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나타난다. "네가 그리스도 자손의 수효를 따랄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은 그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그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온역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그들 중에 온역이 없게 하려"라는 말을 주의 해 보자. 그 돈은 죄의 저주로부터 속함을 받기 위한 돈이 아니라, 온역으로부터 속함을 받기 위한 돈이었다.
 
이 속전은 성막을 건립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회막의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속하리라"(출 30:16).
 
인구 조사를 할 때면 언제나 많은 폐단들이 뒤따랐다. 사람들의 수를 셈으로 그들의 군사력을 스스로 알게 되었고, 이런 경향은 하나님보다는 사람의 힘을 더 의지하도록 하였다. 사무엘하 24장과 역대상 21장은 인구조사 할 때에 다윗이 범했던 죄들을 말한다. 그는 적들로부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보다는 사람들의 힘을 의지했다. 다윗의 이러한 죄로 인해서 이스라엘 위에 온역이 내렸고, 그것으로 인해 칠만 명이 죽었다.
 
그러나 성경에는 사람의 수효보다는 하나님을 더 의뢰했던 기드온의 예도 나온다(삿 7:1-6). 처음에는 삼만이천 명의 백성이 그를 좇아서 싸우러 나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삼백 명만 남기고 모두 돌려보내라고 하셨다. 기드온은 이 말씀에 순종했고, 하나님만을 의지해서 싸운 결과로 미디안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인구 조사 시에 속전을 내게 하셨던 이유를 이해하는 데에 많은 배경들을 제공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힘을 의지하기보다는 끊임없이 그분을 의지하도록 기억시키는 역할을 했다. 속전은 20세 이상의 장정 모두에게서 받았는데, 그것은 그들 자신을 스스로 믿는데서 오는 재앙을 없게 하려 함이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은 단지 속함 받은 백성이며, 이 속함이 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임을 기억하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게 하는 교훈을 준다. 그리스도를 주로 믿음으로 우리는 값으로 사신 바 되었고, 속함 받는 백성이 되었다(고전 6:20).
 
이스라엘의 군대는 실제로는 하나님의 군대였다. 왜냐하면 그것을 위해서 그들이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 자신을 섬겨서는 안 되고 하나님 그분을 섬겨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그분 덕택이기 때문이다.
 
한편 속전이라 말, 곧"ransom money"는 "구속을 위한 돈(atonement money)"이라고도 슬 수 있는데, "구속(atonement)"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덮개"라는 뜻이다. 이것을 그리스만이 우리 성도를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하나임"(at-one-ment)이란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구원받은 후에도 범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 죄를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덮어두신 것일 뿐이다. 때문에 우리는 의롭다 칭함 받는 죄인인 것이다.
 
이처럼 인구 조사시에 의무적으로 돈을 내게 한 것은 그 와중에 백성의 수효를 자랑하는 죄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돈은 죄를 저지르기 전이라도 그 죄를 속(贖)하였다. 이 속전은 나중에 모아져서 성막에서 섬기는 데에 사용되었다. 이것은 자원하는 자만이 바치는 것이 아니라, 의무적으로 드리는 것이었다.
 
앞에서 성막은 은으로 기초한 터에 세워졌고, 그것은 그리스도로 인한 우리의 구원을 상징한다고 했었다. 우리는 죄악된 세상으로부터 구속되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자리에 서게 되었다. 우리자신을 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이지만, 그리스도의 대속하심에 터 자아 이제는 권능있고 부요한 존재들이 되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이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 15:4).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인생의 초점으로 삼았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면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는 말씀이 응하게 된다.
 
우리의 구원이나 섬김에 있어서 하나님과 함께 거할수 있는 것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 위에 터 잡을 때 뿐이다. 이것들은 우리 자신의 노력이나 열심이라는 터 위에는 기초할 수 없는 것이다.
 
3. 널판
 
구약 시대 성막을 건립하는 데에 사용되었던 널판들 또한 오늘날의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던져 준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너는 조각목으로 성막을 위하여 널판을 만들어 세우고..."(출 26:15)라고 말씀하셨다.
 
조각목은 건조하고 메마른 사막에서 자라는 가시나무로서 그것은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사 53:2)라고 묘사된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한다. 이 나무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영광을 예표하는 금으로 덧입혀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모두 널판에서 상징되고 있다. 즉 조각목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덧입혀졌던 금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리킨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셨으나, "육신이 되어 유리 가운데"(요 1:14) 거하시러 오신 신인(神人)이시다.
 
널판은 또한 그리스도 안에 서 있는 성도 개개인을 가리키기도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가가 사람은 그분 안에 굳건히 서있게 된다. 성막 건물의 널판들도 은으로 된 기초 위에 똑바로 버팀목에 연결되어 서 있었다. 여러 개의 널판들이 모여서 하나의 건물을 이루었듯이, 성도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합된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예수께서는 그분 안에서 우리의 하나됨을 위하여 특별히 기도하셨다(요 17:21-23). 엡 1:4-6 또한 우리가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특별히 6절의 말씀을 인해서 우리는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 가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위에서 성막의 널판들은 은으로 된 터 위에 기초했다고 했다. 이것은 세상에 살지만, 그것에 속하지 않은 성도들을 아름답게 비유한다. 갈 1:4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듯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신다는 것이다.
 
또 널판 하나하나는 성도 개개인을 상징한다고 했다. 그 널판도 한때는 볼품 없는 사막의 한 가시나무의 일부에 불과했으나 하나님의 성막의 한 부분을 이루게까지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 있기까지는 많은 과정들을 겪어야 했다. 먼저 도끼로 베어지고 그런 다음 건조되는 과정을 지나서 결국에는 본래의 자신의 모습을 벗겨지고 하나님의 성품을 상징하는 금으로 입혀졌다. 성막의 널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성도로 부르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성품을 주셨다. 그리고 우리는 거룩하신 그 분 안에 연합되어 점점 부르신 부름에 합당한 자로 맞추어져 간다.
 
출 26:26-28에는 조각목으로 띠를 만들어 그 널판들을 지탱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띠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하는 금으로 싸여졌다. 특별히 28절의 "널판 가운데 있는 중간 띠는 이 끝에서 저 끝에 미치게 하고"라는 말을 주의해 보자. 이 중간 띠에 의해 모든 널판들은 하나로 연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성도들을 예표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고전 12:12-14).
 
또 에베소서는 성도들을 건물로 비유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
 
4. 성막 건물의 덮개
 
사막의 모래 바람과 가끔 내리는 비 때문에 성막은 이에 견딜만한 적당한 보호막이 필요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보호막에 대해서 특별한 지시를 모세에게 내리셨는데 이는 출 26:1-14에 기록되어 있다.
 
보호막은 네 종류의 덮개로 되어 있었다. 즉 해달 가죽, 수양 가죽, 염소털, 앙장 덮개가 그것이다. 그것들은 각각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룩하심과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는 사람들에게 보호막이 되어 주시는 예수님을 상징한다.
 
1) 해달 가죽의 덮개
 
성막 건물 가장 바깥쪽의 덮개는 "해달 가죽의 덮개"(출 26:14)였다. 이것은 다른 나머지 세 덮개의 위를 덮는 보호막이었다.
 
이것은 서구 세계에서 알고 있는 해달과는 다른 것이었고, 중동 지방에도 없는 것이다. 이 동물은 나일 강 지역에 많이 서식하는 바다동물인 돌고래일 것으로 추정된다. 돌고래 가죽은 매우 질겨서 신발과 같은 강한 내구성을 요하는 물건들을 만드는 데에 사용되곤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막 지방의 여러 가지 요인들로부터 성막을 보고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사람들은 바깥에서 볼 때 단지 이 덮개만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눈으로 보기에는 전혀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사막의 태양과 바람에 의해서 색이 바래지기까지 하였다. 그 덮개만 보고는 성막 내부의 아름다움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 덮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상징한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볼 때에는 그 분은 사람의 마음을 끌만한 아름다움이 전혀 없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3).
 
사람들은 성막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내부로 들어가야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는 그분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분과의 교제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예수께서는 구원 사역을 완성하시고, 지금 하늘에 계신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에 이제는 성도를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기를 기뻐하신다. 그래서 세상은 우리를 통해서만 그 분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주셨으므로, 이제는 우리가 세상에 예수님을 보여 주어야 한다(요 17:6).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고로, 우리가 증거하는 그분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속적으로 그분을 나타내는 삶들을 살아야 하고 그러므로써 세상으로 하여금 그분을 알기를 원하는 데로 나가도록 이끌어야 한다.
 
예수께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세상으로부터 배척받으실 것을 시 22:6-7은 이렇게 예언하고 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이사야도 예언했다.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며 우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사 52:14).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상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 그분의 존재는 모독을 받고, 그 이름은 무시를 당한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에도 자신의 죄된 모습을 보고 자신의 바랄 소망은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깨닫는 사람들이 있음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자. 성막의 "내부"에 들어온 이 사람들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자들이다.
 
성막의 덮개는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성막의 덮개는 또한 우리의 죄악들을 인하여 상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몸을 상징한다. 죄악된 인간들이 그분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그분의 얼굴에 침 뱉었으며, 하나님의 피조물들인 그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을 때리고, 조롱하였다. 즉 지으심을 받은 자들이 지으신 자를 십자가에 못박고 수치를 당케 하였던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구약시대 선지자들에 의해 이미 예언된 것들이며 그리스도의 진정한 내부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 자들에 의해 행해진 죄악들이다.
 
2) 수양 가죽의 덮개
 
첫 번째 덮개 바로 밑에 덮어서 성막의 내부를 보호했던 두 번째 덮개는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출 26:14)으로 만든 것이었다. 보호막 중 두 번째로 덮어진 덮개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니 않았지만 성막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모두 네 겹의 덮개가 있었기 때문에 수양 가죽의 덮개는 성막 안에서도 밖에서도 볼 수가 없었다.
 
수양의 속죄를 위한 제물로 사용되던 동물이다. 즉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번제물로 바쳐졌다. 신약성경 중 마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수양과 같은 희생제물로 표현한다. 인간은 죄로 인해서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으로 그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 주셨기 때문에, 그 분을 구주로 믿는 이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움을 받는다는 것이다.
 
한편 수양 가죽을 덮개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두질하여 진한 빨간색으로 염색해야 했다. 그리고 나서 성막 내부를 보호하기 위해 서로 연결하여 한 완전한 덮개로 만들었다.
 
그 붉은 물 들인 가죽은 죄인들을 대속하기 위한 희생제물이 되어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성경에서 짐승을 죽여 그 가죽으로 덮개를 만든 이야기는 창 3:21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난 후, 자신과 하와는 벌거벗은 것을 알았다. 그들의 죄가 그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알도록 했던 것이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노력했지만 그들 자신의 노력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그들의 죄를 책망하신 후,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덮을 수 있는 것을 주셨다. 그분께서는 인간이 만든 덮개는 인정하실 수 없었기 때문에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덮개를 그들에게 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결과였다. 즉 하나님의 공의는 죄를 결단코 용서하실 수 없으시지만 대신에 그분의 자비는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고 죄를 덮어 주셨던 것이다.
 
아담과 하와를 위한 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한 짐승의 희생이 있어야 했다. 그 동물을 죽여야만 옷을 만들 수 있었다. 이것이 그 이후에 모든 속죄 제사의 근원이 되었다. 여기에는 조금의 예외도 없다. 인간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 제물이 되는 짐승을 데려와야 했다.
 
가인은 이러한 법을 어겼다. 때문에 가인이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 때 하나님은 그 제사를 열납하지 않으셨다(창 4:3-5). 반면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하나님께 드렸고(창 4:4) 하나님은 그 제사를 열납 하셨다.
 
아브라함의 생애 중 가장 중요한 사건에서 수양은 이삭을 대신한 희생 제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나 뿐인 그의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셨고, 아브라함이 그것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그 다음의 구절을 주목해 보자. "아브라함의 눈을 들어 살펴본 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창 22:13).
 
그 전에 이삭이 "전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창 22:7)라고 물었을 때, 아브라함은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8)라고 대답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을 어떻게 준비하실지 아브라함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후에 그는 자신의 눈으로 그것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찬양 드리며, 그 땅 이름을 "여호와께서 준비하심"이라는 의미의 "여호와 이레"라고 하였다. 즉 하나님께서 이삭을 위해 속죄제물을 준비하셨던 곳이라는 것이다.
 
이 사건은 후에 솔로몬 성전이 건립될 곳이었던 모리아 산에서 있었다. 또 이와 동일한 지역인 갈보리 언덕에서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그러므로 이 사건에서 수양은 궁극적으로 세상 죄를 대속하기 위해 돌아가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수양 가죽으로 만든 붉은 물들인 이 덮개는 성막의 내부를 안전하게 보호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만 진정으로 보호받으며 안식할 수 있다.
 
3) 염소털로 만든 덮개
 
수양 가죽의 덮개 바로 밑의 보호막은 염소털로 만든 것이었다(출 26:7). 성경에서 염소는 종종 죄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그 덮개는 성막 내부에서 볼 수 있었던 아름다운 앙장으로 만든 덮개 바로 위에 씌여졌던 것이다.
 
염소털로 만든 덮개는 죄를 대속하기 위해 드려지신 대속물로서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네 개의 덮개가 각각 그리스도를 어떻게 상징하고 있는지 정리해 보도록 하자. 먼저 가장 바깥쪽의 해달 또는 돌고래 가죽으로 만든 덮개는 멸시받으셨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두 번째 수양가죽의 덮개는 희생 제물로서의 그리스도를, 세 번째 염소털로 만든 덮개는 대속 제물로서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가장 안쪽의 네 번째 덮개는 왕으로서, 종으로서, 완전한 신인(神人)으로서의 삶을 사셨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네 번째 덮개에 대해서는 다음절에서 자세히 살피기로 하자.
 
다시 본래로 돌아와서 염소털로 만든 덮개를 생각해 보자. 이스라엘의 대속죄일에는 두 마리의 염소가 대속 제물로 드려졌다. 이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케 한다.
 
레위기 16장은 속죄제로 두 마리의 염소가 드려진 방법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먼저 한 염소는 죽여서 그 피를 속죄소 위와 앞에 뿌렸다(레 16:15). 이 염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한다. 그리고 나서 제사장은 나머지 살아있는 한 염소 위에 손을 얹고 이스라엘의 죄악들을 고백한 후 그 염소를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광야 먼 곳으로 내보냈다. 이 염소는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이런 이유로 사람이 여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죄에 대한 대가가 지불되고 죽음의 자리로부터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죄악들을 친히 담당해 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만일 사탄 자신이 인류의 죄악을 담당하였다고 그 어느 누구가 송사할지라도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알려주는 바가 전혀 없다. 오히려 사탄은 그 자신의 죄를 짊어지고 불과 유황 못에 던지움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계 20:10).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담당하신 구속자이심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요 1:29; 벧전 3:18).
 
인류의 죄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그분 위에 놓여졌다. 그래서 고후 5:21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고 기도하셨다. 여기서 예수께서 "이 잔"이라고 하신 것은 무엇을 일컫는 것이었는가? 그분은 죄 이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으셨으므로 아마도 그것은 죽음 그 자체 보다는 죄의 잔을 말씀하신 것 같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생을 기꺼이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셨다고 요한복음 10:17-18은 말한다.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정결하심 안에는 어떠한 죄도 거하지 못했다. 그래서 세상의 죄들이 자신 위로 옮기울 것을 아시고는 그 잔을 옮겨 주시기를 세 번이나 간구 드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 분은 죽음이 옮기워지기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으로 분리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그 분께서 인간의 죄를 담당하셨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이것이 주님이 십자가 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고 크게 소리 지르셨던 이유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죄를 보실 수가 없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달려야 할 십자가에 당신의 외아들이 달려 돌아가실 때에도 자신의 등을 돌리셔야만 했다. 그리고 그분은 너무나 마음이 아프셔서 세상으로 하여금 그렇게 괴로워하시는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도록 어두움을 내리셨다.
 
속죄일에 한 마리의 염소가 속죄제로 바쳐졌던 것처럼, 그리스도는 십자가상에서 우리들의 죄의 대가를 속하셨다. 그리고 살아있는 염소가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멀리 보내졌던 것처럼, 그리스도는 자신의 구주로 믿는 사람들의 죄를 친히 짊어지시고 그것을 영원히 먼 곳으로 보내어 버리셨다.
 
그리스도께서 구원 사역을 십자가상에서 마치셨을 때, 세상은 다시 밝아졌고, 성전 휘장은 둘로 찢어졌다(히 10:19-20). 즉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로 나오는 자는 누구나 그분을 뵈러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비록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나 이러한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을지라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대속주(代贖主)로 영접하는 사람들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 자신의 죄를 속한 분으로 영접하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여전히 자신의 죄 가운데 거하게 되고 심판 아래 머물게 된다.
 
고백과 회개,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해주신 바를 인정하는 것만큼이나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잠 28:13은 말한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3).
 
4) 앙장으로 만든 덮개
 
가장 내부에 씌워졌던 성막의 네 번째 덮개는 "앙장"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위는 청색, 자색, 홍색실로 수놓아졌다.
 
성막이 건립되면 이것이 제일 먼저 성막의 건물을 덮었고, 그 위에 다른 덮개들이 차례차례 씌워졌다. 그리고 성막 내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앙장으로 만든 덮개뿐이었다. 바깥쪽에 있던 덮개들은 볼품없는 것들이었지만 가장 내부의 이 덮개는 매우 아름다운 것이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성막의 내부로 들어온 사람만이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듯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만이 그리스도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 수 있다.
 
앙장은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놓아 만들어졌다. 이 앙장은 모든 영광 가운데 계시고 완전한 공의를 가지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먼저 흰색은 죄 없으시고 공의로우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신성을 상징하는 청색은 그리스도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나타낸다. 또 홍색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이 죽으심을 나타낸다. 청색과 홍색을 혼합한 자색은 그분의 왕권을 상징한다. 즉 그리스도의 왕적인 권위와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앙장에는 펼쳐진 날개를 가진 그룹의 모양이 베실로 수놓아졌다. 그것들은 마치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겼던 제사장들 위에서 항상 날아다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성경에서 그룹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도 그룹은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 성막 안의 거룩성을 보호하는 자로 나타난다. 동시에 그 거룩한 성막 안에 있는 사람의 거룩도 보호한다. 그룹은 창세기 3:24에서 처음 언급된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을 두셔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 이런 의미에서 그룹은 인간의 죄로부터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손상되는 것을 지키는 역학을 하는 천사라고 할 수 있다.
 
제사장들이 성소 암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천장을 바라보면, 그곳에서 날아다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룹을 볼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항상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보시고, 보호하시고 계시다는 사살을 기억할 수 있었다. 시편 기자는 당신의 백성을 항상 지키고 계신 하나님을 깨달은 후, 이렇게 고백하였다.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저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시에 살게 하시는도다"(시 33:18-19).
 
성막 밖에 있는 세상은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이런 아름다움을 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밖에 거하는 자연인은 영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2:14; 고후 3:3-4). 단지 거듭난 사람의 영혼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의 인생의 최대의 열망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더 많이 아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인하여 이전에 그에게 유익하던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기를 원했다(빌 3:7-9).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기를 원하는 바울의 열망은 빌 3:10에 간절히 나타난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진정으로 보게 될 때 우리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들이 될 것이다. 그분의 영광을 뵈었을 때 욥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단지 구원받은 것으로만 만족하는 것(즉, 번제단 앞에 멈추어 서있는 것)은 슬픈 일이다. 우리가 성소 내부로 들어가서 다른 것(진설병상, 향단, 순금등장)을 접하면 접할수록 우리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한껏 보고 찬양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