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코프의 조직신학 - 기독론 1
1부 그리스도의 위격
1. 기독론의 역사
초기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문제점이 제기 되지 않았다. 그러자 기독교가 발전하고, 여러가지 문화와 종교와 접하면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 되었다.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 제일 먼저 문제를 제기한 것은 유대계 기독교인들이다.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유일신을 믿었기에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할 수 없었다. 에비온파와 알로기파는 예수님이 세례때 성령을 받고 메시야의 자격을 얻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주장들은 단일신론자들(Dynamic Monarchians)의 입장과 일치된다. 이 단일신론자의 대표자인 사코사타의 바울은 예수님과 로고스를 구별하고 예수님을 한 인간으로 보고, 세례 당시에 로고스가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함께 반대측에서는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게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영지주의이다. 이들은 이원론적 관점에서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정하고, 그가 단지 환영적인 몸을 취했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주장들은 양태론적 단일신론자들(Modalistic Monarchans)과도 연관된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한 양태 내지는 현현으로 보았다.
이런 영지주의에 반대하여 알렉산드리아의 교부들은, 터툴리안과 오리겐등은 예수님의 인성을 변호했지만 종속론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아리우스주의로 발전하게 되었다. 아리우스주의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은 아니지만 인간보다 뒤어난 시간 이전적이고 초인적인 피조물 곧 피조물의 첫 열매로 보았다. 이런 주장은 321년 니케아 공의에 의해 아타나시우주의에 패배하게 된다.
예수님의 신성 교리가 니케아 공의에서 채택되지 이제 예수님의 양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 되었다. 아폴리나리스는 헬라의 삼분설을 채택해 예수님의 육과 혼과 영을 주장하고, 영의 부분을 로고스로 대치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신성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도, 예수님의 인성을 주장하려고 했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고, 신성은 인성 가운데 내주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 신성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은 예수님만이 특별히 그 신성이 충만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유티케스는 예수님의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모든 주장들은 451년 칼케돈 회의에 의해 정죄되고,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이 주장되었다. 칼케톤 회의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주장하면서 이 두 속성이 다른 속성에게 영향을 주거나 침범하지 않는다고 확정하였다.
종교개혁 이후 루터파들은 신성과 인성의 속성간의 교류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인성이 신성에 흡수된다는 유티케스주의의 한 방편이기에 개혁파에 의해서 거부되었다.
19세기 이후의 현대 신학자들은 예수님을 뛰어난 인간으로 보았다. 슐라이에르마흐는 예수님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신의식(God-consciousness)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리츨은 예수님의 위격보다는 그의 사역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이룩한 업적과 행한 봉사의 견지에서 볼 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의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의 선재, 성육신, 동정녀 탄생 등을 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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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리스도의 명칭과 성질
그리스도의 명칭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 인자, 하나님의 아들, 주(퀴리오스)로 불린다. 또한 성경은 예수님이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저자는 이 예수님의 양성이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 믿는 것이라고 말한다.
"교회는 단일 위격의 양성 교리를 받아들였는데. 그 비밀을 완전히 이해해서가 아니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계시된 신비임을 직시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래로 이는 인간의 이해를 훨씬 초월하는 신앙 조항으로서의 교회 내에 존속하였다. 본 교리에 대한 합리주의적 공격이 끊일 새가 없었지만, 교회는 그것을 거듭 반이성적인 것으로 언명되었음에도 확고부동하게 이 진리를 신앙으로 고백하였다.(P545)"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성경에 의해서 계속해서 증거 된다.(이 책에서는 이 부분들에 대한 성경구절들이 매우 자세하게 나열되어 있다. 저자는 우리가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이처럼 중요시 여기며, 세상과 타협하지 말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예수님의 인성의 필요성 "인간이 법죄 하였으므로 형벌도 인간이 당하는 것이 필연적이다. 더욱이 형벌의 감내에는 육신과 영혼의 고통이 포함되는데. 이는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스도는 인선을 취하시되 그 모든 본질적 속성뿐만 아니라 타락 후 인성이 처했던 일체의 연약성도 취함으로써, 인간이 겪은 타락의 밑바닥까지 떨어질 필요가 있었다. 동시에 그는 무죄한 인간이어야 했다. 왜냐하면 스스로 죄인이고 자기의 생명을 상실한 인간은 타인을 위해 속죄할 수 없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오직 인류의 고통을 체험적으로 알고 일체의 시험을 극복한 진정한 인간의 중보자만이 인간의 모든 경험, 환난, 유혹을 체휼할 수 있고, 그 추종자들의 완벽한 인간적 모범이 되실 수 있는 것이다.(P548)"
예수님의 신성의 필요성은 첫째 그가 무한히 값진 희생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율법에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 둘째 그가 하나님의 진노를 구속적으로 감당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셋째 이미 성취하신 사역의 성과를 믿음으로 그를 영접하는 사람들에게 베푸실 수 있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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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리스도의 일위성
칼케톤 신조는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 한다. "양성을 인정하되 두 본성은 혼동되거나 변화하거나 구분되거나 분리되지 않으며(inconfusedly, unchangeably, indivisibly, inseparably), 양성의 구별은 연합으로 인해 결코 말소되지 않고 오히려 각자의 성의 특징이 보존되고, 두 위격으로 분할되거나 구분되지 않고, 하나의 위격과 실체로 합치된다."
그러나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양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양성을 하나의 신비로 규정하였다. 비록 교부들이 그리스도의 양성을 설명하거나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어도 그들이 그리스도의 양성을 믿었던 것은 그것이 성경에 증거 된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성경에서의 다음과 같은 증거를 통해 그리스도의 성육신, 즉 신성과 인성의 결합을 통한 일위성을 주장한다.
첫째는 성경에는 이위성을 지지하는 증거가 없다.
둘째는 성경에서 이성(二性)은 일위에 연합되어 있다고 묘사한다.
셋째는 한 위격이 양성의 어느 한 족에 관련되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위와 같은 증거로 저자는 그리스도의 한 인격(일위성)에 이성(신성과 인성)이 연합된 결과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는 신성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 개혁주의 신학은 신성의 불변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불변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자 예수님 역시 인성을 취했지만 그 신성은 불변하셨다.
둘째는 성육신의 결과 삼중 교류가 있었다. 그것은 신성과 인성간의 교류, 업적 또는 사역의 교류, 은사 또는 은혜의 교류이다.
셋째는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을 취하심으로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고, 그를 통해 우리의 기도자가 되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일위성은 신비이다. 이 과정을 저자인 벌코프는 인간의 몸과 영혼의 결합으로 설명한다.
"이성(二性)의 일위(一位) 속의 연합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며, 바로 그 때문에 종종 부정되기도 한다. 그것은 때로, 인간 내부에 영육이 결합되어 있음과 비교된다. 인간은 물질과 영혼의 두 실체로 구성되어 있는데, 양자는 극히 밀접히 결합되어 있지만 혼합되어 있지 않으며, 중보자도 그러하다. 인간의 경우, 결합의 원리인 인격은 육체가 아닌 영혼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중보자의 경우에는 인성이 아닌 신성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영과 육의 상호 영향력 행사가 하나의 신비이듯이 그리스도 안의 양성의 관계와 그 상호 영향력의 구조도 그러하다. 육체와 영혼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 인격에 귀속되듯이 그리스도의 양성 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은 그 위격에 귀속된다.(P554)"
이 그리스도의 일위성은 신비이기에 인간의 이성으로 전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많은 학파들에서는 그 일위성을 자신들의 나름대로 해석하려고 하다가 오류에 빠지고는 하였다. 이 장의 후반부에 저자는 이런 잘못된 일위성의 해석을 다루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루터파의 속성간의 교류론이다. 속성간의 교류론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속성이 서로 교류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에 이 학설은 제한적으로 활용되어 신성이 인성에 전달된 부분만을 주장하였다. 루터파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속성을 사역적 속성(operative attributes : 전능, 편재, 전지)과 정적 속성(quiescent attributes : 무한, 영원)을 구별하며 전자의 속성만이 인성으로 이전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개혁파 신학자들은 이 속성간 교류론이 성경에 주장되지 않았으며 신성과 인성의 속성은 합쳐 질 수 없는 것으로 인성에 신성이 전달되면 인성 자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또한 저자는 점진적 성육신론도 다루고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점진적으로 신성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단번에 인성을 취해 육신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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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그리스도의 신분
1장 비하의 신분(The State of Humiliation)
2부 부터 저자는 그리스도의 신분을 다루고 있다. 그리스도의 신분은 크게 비하와 승귀로 나누어진다.
개혁신학에서 그리스도의 비하를 케노시스와 타페이노시스로 나눈다. 케노시스란 그리스도가 신적 위엄을 포기하고 종의 형상을 가진 것을 말한다. 타페이노시스는 그가 인간의 육체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여' 고난을 당한 것을 의미한다. 이 타페이노시스는 갈라디아서 4장 4절에 근거한다.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여자에게 보내사 율법 아래 나게 하심은...."
개혁신학에서는 이 그리스도의 비하를 5단계로 본다.
첫째는 성육신이다.
그리스도의 비하의 첫번째는 성자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기적이라고 하는데 이 기적은 단순히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적에 속한 필연적인 사건이라는 것이다. 일부 개혁파 신학자들이나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은 이 성육신을 죄와 상관없는 창세전부터 계획된 필연적인 사건으로 본다. 그러나 저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인간의 죄와 관련된 필연적인 사건으로 본다. 또한 그는 성육신 자체가 비하라고 보는 견해를 조심스럽게 수정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육신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저자는 인간의 세상에 오셔서 연약, 고난, 죽음 아래 놓인 것을 성육신의 비하로 본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고난이다.
저자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독특성을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십자가에서만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전생애를 고난 가운데 사셨다.
"그의 전 생애가 곧 고난의 일생이었다. 그것은 만군의 주의 종 된 생활이었고, 무죄하신 이가 날마다 죄인들과 어울려야 했던 삶이었다. 그로서는 순종의 길이 곧 고난의 길이었다. 그는 사탄의 반복된 공격과 동족의 증오와 불신, 원수들의 핍박으로 고통당하셨다. 그는 홀로 포도즙틀을 밟으셨으므로 그의 고독감은 극심했고 책임감은 압도적이었을 것임이 분명하다.(P571)"
또한 그의 고난은 단순히 육신의 고난에 한정되지 않고 영혼의 고난까지 포함한다. 저자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고난은 육신에 있지 않고 그가 인류의 죄악을 짊어져야 했다 영혼의 고난에 두고 있다.
셋째는 구세주의 죽음이다.
인간의 죽음이 죄의 결과라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간의 죄에 대해 사법적으로 부과된 형벌이다. 그러기에 그는 육신적으로도 영혼적으로도 가장 잔인한 형벌을 당하셨다.
넷째는 그리스도의 장사이다.
인간이 죽은 후 흙으로 돌아가는 것, 또한 그가 지하 무덤에 뭍히는 것은 인간의 죄의 결과에 대한 표시이다. 그리스도 역시 이런 비하의 단계를 겪으셨다.
다섯째는 음부로 내려가신 것이다.
이 부분을 카톨릭은 그가 지옥으로 내려가서, 이미 죽은 자들을 구원하신 것으로 본다. 그러나 개혁신학은 그가 음부로 내려갔다는 것은 그가 지옥같은 고통을 겪었다는 것으로 해석한다.(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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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승귀의 신분(The Station of Exaltation)
개혁신학에서는 그리스도의 승귀를 그의 인성적인 측면으로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승귀의 의미는 그가 스스로 율법의 속량 아래 놓였다가 그 지배를 벗어나서 이제는 그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사람들을 구속하는 중보자의 위치에 서 계시다는 것이다. 개혁신학에서는 이 승귀를 네 가지 단계로 본다.
첫째는 부활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부활을 통하여 잠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셨고(고전 15:20)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가 되셨다고 말한다.(골1:18, 계1:5) 이 의미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단순히 육신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성취이며, 구원의 완성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육신적이며 동시에 영적이다. 그의 몸의 부활은 죽음 전의 몸과 동일한 몸이 아니요 변화된 몸이다. 즉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신령한 몸이고,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부활을 대표하는 증거이다. 저자는 예수님의 부활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생(요나의 표적)이며 하나님의 참 아들이셨음(롬1:14)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였다. 그것은 또한 영생의 사실성에 대한 최고의 증거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부활이 구속 사역의 핵심, 따라서 복음의 핵심에 하나의 구성 요소로서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의 위대한 기초석 중의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효력을 가지려면 죽음이 아닌 생명으로 종결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그것은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대한 천부의 추인이자, 그것을 열납하셨다는 공적 선언이었다. 그 속에서 그리스도는 율법의 지배를 벗어나셨다. 끝으로 부활은 다시 사시고 승귀하신 예수께서 교회의 머리와 우주적 주님으로서 새로운 삶에 들어가심이었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구속사역의 성과를 베푸실 수 있게 해 주었다.(P584)"
그러나 오랫동안 부활을 부정되어 왔다. 특히 기독교 내에서도 부활은 많이 부정되어 왔다. 부활에 대해 반론으로는 허위설, 기절설, 환상설, 신화설 등이 있다. 허위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허위로 퍼뜨렸다는 것이고, 기절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나셨다는 것이고, 환상설은 제자들이 죽은 예수님을 그리워하다가 환상을 보았다는 것이고, 신화설을 고대 근동의 부활의 신화를 예수님의 부활에 접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은 성경의 사실과 위배된다.
두번째는 승천이다.
성경에서 승천은 부활만큼 강조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것 역시 그리스도의 승귀에 관련되어 깊은 의미를 가진다. 저자는 승천을 삼중적 의미로 해석한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의 완성과 그 중보자의 나라(Kingdom of the Mediator)가 유대인의 나라가 아닌 보편 국가였다는 것을 명확히 한 것이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주적 통치권을 회복하셨음을 의미한다.
셋째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처소를 예배한다는 의미이다.
세번째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심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았다는 것은 문자적인 의미를 뛰어 넘어 그가 교회와 우주에 대한 지배권을 받으신 것과 그에 합당한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서 통치한다는 의미는 그가 교회를 통치하시고 보호하신다는 의미이다. 또한 그가 하나님의 우편에서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며 우리의 연약함을 지금도 감당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마지막으로 그가 성령을 통하여 교회와 성도들을 인도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승귀의 마지막은 예수님의 육체적 재림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의미는 그가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승리에 대한 마지막 표지이다.
제 3 부 그리스도의 직분
기독론의 마지막인 3부는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분인 선지자직, 제사장직, 왕직에 대해 이야기 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그리스도의 직분과 사역에 대한 핵심을 이야기 하는 부분으로 기독론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스도의 삼중직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강조한 사람은 칼빈이였다. 그러나 현대 신학에서는 이 그리스도의 삼중직이 많이 비판을 당한다. 현대 신학에서는 그리스도를 이상적인 인간으로 보고, 그의 사역을 타인에 대한 사랑 정도로 보기에 그를 직분적 인물(offisial character)로 이해하지 않으려 한다.
1, 선지자직(The Prophetic Office)
그리스도의 직분 중 제일 먼저 강조되는 것은 선지자직이다. 선지자의 히브리어는 나비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백성에게 전하는 의미이고, 다른 히브리어인 로에, 호제는 하나님의 사자, 주의 사자라는 의미이다. 헬라어는 '프로페테스'이다. 이 단어들의 뜻은 '말을 발하다'라는 의미이다. 즉 선지자의 역할을 하나님의 뜻을 백성에게 드러내는 것이다.
예수님이 바로 이 선지자의 사역을 감당하셨다. 그러나 그가 선지자보다 위대한 것은 그의 가르침은 단순히 언어적인 것을 넘어서 성육신, 속죄의 죽음, 부활, 승천 등 실제적이며, 구약의 여러 가지 예표를 이루는 완전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신학은 이런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의 인격의 위대성만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 역시 그의 위대한 인성에서 나왔다고 본다. 결국 현대 신학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기보다는 위대한 선생으로 본다. 저자는 바르트의 신학에서도 현대 신학과 유사한 점이 발견된다고 말한다. 저자는 바르트가 성육신을 화해의 측면에서만 강조하여 계시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로만 보고 있다고 말한다.
2. 제사장직(The Priestly Office)
선지자와 제사장은 모두 하나님께 임명을 받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에서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러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표하여 백성에게 이야기 하는 반면, 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하나님께 아뢰는 역할을 한다. 즉 선지자가 윤리적, 영적인 의무, 책임, 특권을 강조했음에 비해, 제사장은 하나님께 올바로 나아가기 위한 요건인 의식의 준행을 강조했다.
예수님 역시 인간의 연약함을 감당하기 위해 대제사장직을 감당하였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는 제사장이라고 이야기 한다.(히5:6) 이 제사장의 직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저자는 속죄와 대속의 측면을 강조한다. 구약의 제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지만 가장 성경적인 것은 제사 때 드려지는 예물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고, 속죄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표적인 것이고, 그리스도에게 와서 모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어린양(요1:29),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벧전1:19), 유월절 어린양(고전5:7)으로 묘사한다.
현대신학은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부정하지만 특히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부정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속죄와 대속의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3. 속죄의 원인과 필요성
현대신학과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을 무자비한 신으로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속죄에 대한 여러 가지 역사적 견해들을 제시한다. 중세 신학, 특히 둔스 스코트에 의하면 속죄는 하나님의 전횡적인 것으로 본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없이도 하나님이 구속사역을 하실 수 있다고 본다. 현대신학 역시 속죄를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신비설과 도덕 감화설의 견해로 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결합이다.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분이시다. 그러기에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체가 공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한편 사랑의 하나님은 사랑으로서 인간을 용서하려 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저자는 이 속죄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하나님은 그의 신적 의와 거룩함으로 인해 그의 무한한 위엄에 대한 도전을 단순히 묵과할 수 없고 죄를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의 자명한 교훈으로 여겨진다.
둘째, 하나님의 본성 속에 내재된 신적 율법의 위엄과 절대적 불변성으로 인해 그는 죄인에게 대가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율법의 위반에는 필연적으로 형벌이 주어진다. 그것은 소지니의 생각처럼 하나님의 자유 의지의 소산이 아니고 그의 본성 자체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결코 어길 수 없는 법칙이다.
셋째, 속죄의 필요성은 또한 진리의 신이시며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정직성에서 기인한다.
넷째, 죄는 단순히 인간의 연약성이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하나님의 대항하는 것이기에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된다.
다섯째, 구약 성경은 제사와 희생제물의 모형을 통해서 속죄의 필요성을 언급한다.
4. 속죄의 성질
그렇다면 이 속죄의 성질은 무엇인가? 저자는 속죄를 객관적(objective)인 것으로 본다. 속죄가 객관적이라는 것은 속죄가 단순히 죄인의 상태를 변화시키는 주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의 죄에 대한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하나님의 화해가 되었다는 객관적인 측면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여전히 죄인 되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불러 주신다. 따라서 우리가 의인으로 변화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우리를 의인으로 선포하시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속죄를 대리적인 것으로 본다. 이 부분에 대해 세상에서는 부정적인 시각이 많다. 즉 물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대리적 변재가 가능하지만 죄에 대해서는 대리적 형벌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다음과 같은 조건에서 대리적 속죄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1)죄 지은 측이 형벌을 끝까지 받으므로 의로운 결말을 가져올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을 때, 2)형벌의 이전의 무고한 제삼자의 권리와 특원의 침해하거나 그들에게 고통과 결핍을 주지 않을 때, 3)대신 형벌 받는 당사자가 이미 법에 저촉된 상태가 아니고, 그의 모든 봉사가 정부에 신세를 진일이 없을 때, 4)범죄자측이 자기 죄를 인식하고, 대리인이 자기를 위해 대신 고통 받는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마지막으로 저자는 속죄가 그리스도의 능동적이고 수동적 순종을 포함한다고 말한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죄를 벌하시는 분으로, 그리스도는 그 죄를 묵묵히 감당하는 희생양으로만 본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수동적인 순종만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속죄가 성부 하나님의 독단적인 결정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합의에 의한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사역은 그의 능동적인 순종이었다는 것이다.
5. 속죄의 제반 이론들
1) 초대 교회의 제 이론
초대 교회에서는 사탄속죄설과 초괄 갱신설이 유행하였다. 전자는 속죄가 인간의 죄에 대한 사탄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고, 후자는 속죄가 우리 인류를 하나님과 아담의 처음 관계로 우리를 이끈다는 것이다. 저자는 저자를 기묘하고, 통속적인 이론이라고 보고, 후자의 경우는 심오한 이론으로 본다.
2) 안셀름의 속죄 만족설(Satisfaction Theory, Commercial Theory)
안셀름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하나님의 공의에 두는 대신 벌충이나 보상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명예에 두고 있다. 저자는 이 속죄 만족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죄는 피조물이 하나님께 마땅히 돌리지 않는데 있다. 인간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도둑질 당했고, 따라서 이를 요구할 필요가 발생했다. 이는 다음 둘 중의 한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즉, 형벌에 의하거나 만족(보상)에 의해서, 하나님은 자비로 인해 만족의 방편을 추구하셨는데, 그것은 좀 더 구체적으로 그의 아들을 선물로 내어주심으로써 이루어졌다. 그것이 유일한 방도였음은 요구되는 만족이 무한대의 것이었기 때문이다.(P626-627)"
3) 도덕감화설(The Moral Influence Thoery)
안셀름의 속죄 만족설에 반대되는 것이 아벨라르의 도덕 감화설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본성이 속죄를 요구하기 보다는 속죄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으로 이를 통해 인간의 마음을 감화시켜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4) 모범설 (The Example Theory)
이 이론은 종교개혁의 속죄론에 대항하여 소지니주의자들이 주장하였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를 속하는 역할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 참된 모범을 보이사 그들도 이 같은 삶을 살도록 감화하심으로써 인간을 구원하신다고 주장하엿다.
5) 통치설 (The Governmental Theory)
이 이론은 종교개혁의 속죄론과 소지니주의의 모범설의 타협점으로 제시되었다. 이 이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지탱하기 위하여, 죄에 대한 그 분의 거룩한 불쾌감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였다는 것이다.
6) 신비설 (The Mystical Theory)
이 이론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이 우리의 영혼에 신비로운 작용을 하여 인간의 타락성을 근절시키고 하나님과 재결합시키게 했다는 주장이다.
7) 대리회개설 (The Theory of Vicarious Reoentance)
이 이론은 그리스도가 인간을 위해 대신 완전한 회개를 드렸다는 이론이다.
6. 속죄의 목적과 범위
이 부분에서 저자는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제한속죄론'에 대해서 언급한다. 제한속죄론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택한 자만을 위하여 피를 흘렸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논쟁에서 먼저 중요한 것은 이 논쟁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대속할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속죄의 의도가 과연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인가?' 아니면 '택한 받은 사람을 위하여 인가?'라는 부분이라고 이야기 한다.
저자는 먼저 개혁신학에서 주장되고 있는 '제한 속죄론을 증명한다. 우선 저자는 하나님의 계획은 확실히 유호하며 인간의 어떠한 행위에도 좌절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또한 성경에도 계속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택한 받은 자를 위하여 죽으심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제한 속죄론의 반대자들은 '세상'이라는 단어를 통해 성경에도 예수님이 세상을 위해 십자가를 진다는 말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 세상이란 말이 신약성경에서는 비유대인과 그들에게 전파되는 복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지 온 세상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7.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언자라고 묘사한다. 이 말은 헬라어의 팍라클레토스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일차적인 의미로는 타인의 곁에 부름받은 자를 의미하고 이차적으로는 그에게 조언하거나 조력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언자로서 우리를 중보하는 역할을 한다.
저자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구약의 대제사장의 역할에 비유한다.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온전한 희생 제사와 함께 지성소로 들어가서 이를 하나님께 드린 것 같이 그리스도도 그의 온전하고 흠없고, 충족한 희생과 함께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서 이를 아버지께 드렸다.
또한 이 중보는 법적인 요소 역시 포함한다. 그는 우리의 속전을 드림으로서 우리 인간에 대한 어떤 정죄에도 불가능하게 하셨다.
마지막으로 중보 사역은 지금도 우리의 도덕적 상태에 영향을 미친다. 그는 우리의 연약함에도 부족하고 지금도 우리를 중보하시어 우리를 성화의 단계로 이끌고 있다.
8. 왕직
그리스도의 마지막 직분은 왕직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모든 피조물의 통치자임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성육신 이후 그리스도는 좀 더 구체적인 방법으로 이 땅을 다스린다. 그것은 성령을 통하여, 교회를 통하여 믿는 자들을 다스리고 인도하시는 역할을 하고 계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왕국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근거하고 있으며, 영적인 왕국이다. 이 왕국은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 땅에 먼저 시작되어 있고, 지금도 진행단계에 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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