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정표/핵심성경연구-신약

사도행전16 - 행 15장(예루살렘 회의)

JORC구원열차 2009. 7. 16. 13:42

15. 사도행전 15장 / 예루살렘 회의

 

1. 안디옥에서의 의견 충돌 (행 15:1-2)

 

하나님의 사역이 진전을 보이고 있을 때는 언제나 사단이 반대를 시작하며, 대개는 거짓말을 이용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영향력이 없어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대신 마귀의 “종교적인 거짓말”을 믿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어떤 바리새인들이(5, 24절) 안디옥에 와서,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모르면 그들의 구원이 무효하다고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했다. 물론 바울이 그렇게 전한 것은 아니었다(13:38-40).

 

바울과 바나바는 이들과 논쟁을 했으며 결국 이 문제를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가져가기로 결정을 보았다. 이것은 순전히 자발적인 결정으로서, 지교회의 일을 처리하는 “교단적인 성직 계급”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상,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하나님께 분명한 명령을 받았다. 갈라디아서 2장 1-2절에 보면 “계시를 인하여 올라갔다”고 했는데, 이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계시에 순종하여” 또는 “하나님의 계시에 인도하심을 받아”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의 프로그램에서 이방인의 지위를 단번에 모두 확정짓기를 원하셨다.

 

이방인 신자들이 혼돈을 일으키기에 얼마나 쉬운 일이었던가를 명심하자. 이들은 이스라엘을 통해서만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구약적 가르침에 빠져 있었다. 예루살렘 교회가 알고 있는 유일한 이방인들의 구원의 역사는 바울이 아니라 베드로에 의해 이루어 졌으며, 이를 하나님의 특별한 행위로 받아들였다(행 11:18). 이 시대에는 소식이 신속하게 전해지지 못했으므로, 이들은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여행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신 모든 일들을 알지 못했다.

 

이 사람들은 진지했으나, 심각한 잘못을 범하고 있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6절 이하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이들은 “복음”을 전하기는 했으나 불완전한 복음을 전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었지만 사도 바울을 통하여 이방 사람들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을 알 수 있을 만큼 진전을 보지는 못했다. 이들이 “거짓 복음”을 전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불완전한 복음”이라고 하는 편이 좋겠다.

 

2. 예루살렘에서의 심의 (행 15:3-21)

 

이 전략적인 협의회에는 최소한 네 차례의 모임이 있었던 듯하다. 즉 바울과 그 일행을 환영하는 교회의 공식 모임(행 15:4)과, 바울과 핵심 지도자들 간의 개인적인 심의회(갈 2:2), 강력한 유대 분파가 자신들의 주장을 제시하였던 두번째의 공식모임(행 15:5/갈 2:3-5)과 최종적인 적절한 결정을 내린 회의(행 15:6)들이다. 갈라디아서 1-2장을 주의깊게 읽자. 이 부분은 이 문제에 대한 바울의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베드로가 일어나 연설을 하기까지는 논의가 진전을 보지 못한 채 계속되었다. 사도행전에서의 베드로의 출현이 바울과 그의 이방인에 대한 사역을 지지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베드로후서 3장 15-16절에도 바울을 지지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베드로의 마지막 말이다. 베드로는 고넬료와 연관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다루셨는가를 회상하며(행 10-11장), 오순절날 유대인들에게 임한 성령이 이방인들에게도 임한 것으로 보아 하나님께서 친히 이방인들을 용납하셨음이 분명하다고 강조하였는데, 이 이방인들은 믿음(15:9)과 은혜(15:11)로 구원을 받았던 것이다.

 

11절에서 그가 한 말에 유의하자. “우리가(유대인)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로 믿노라.” “그들이 우리의 방식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이다. 베드로는 율법이 이방인에게만 해당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도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모세와 할례”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라는 메시지인 것이다.

 

다음으로는 바울과 그의 일행이 증거하였는데 하나님이 이방인들 중에서 역사하신 일들을 보고하자, 반대하던 의견은 완전히 조용해졌다. 다음으로 야고보가 발언권을 얻어 최종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으로서, 베드로를 대신하여 예루살렘의 지도자가 된 것이 거의 확실하다. 15장 14-21절에 나오는 야고보의 말은 이 시대의 하나님의 계획이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하고 계신 일은 무엇인가? 주님은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이방인들 중에서 한 백성을 뽑아내시는 중이었다. “뽑아낸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엑클레시아”(ejkklhsiva)이고, 신약 용어로는 “교회”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다 죄인이며, 유대인과 이방인은 같은 바탕에 서 있다. 그리고 “첫째는 유대인에게”란 프로그램은 이제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왕국에 대하여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신 약속은 어떻게 되는가? 야고보는 아모스 9장 11-12절을 인용하여 이에 답한다(15-17절). 그는 이방인들이 불러냄을 받는다는 것이 아모스의 예언의 성취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구약에서 예언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야고보의 말은 이 새로운 프로그램이 아모스의 말과 일치한다는 뜻이다. 이방인들의 수가 충만히 찬 후에 그리스도는 돌아오셔서 다윗의 집(장막은 “집” 또는 “가족”을 뜻함/ 삼하 7:25-29)을 다시 세우실 것이며, 이스라엘을 위하여 왕국을 창설하실 것이다.

 

로마서 9장 29-33절과 11장 1-36절을 읽고 이 새로운 프로그램에 대하여 바울이 설명한 바를 알아보자. “이방인의 충분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눈멀게)된 것이라”는 로마서 11장 25절이 관건이 된다. 그런 다음에 교회는 휴거될 것이며, 이스라엘은 땅을 회복하게 되고, 7년 동안의 환란이 임한다.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정결하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는 다윗의 보좌를 회복하기 위하여 돌아오시게 될 것이다.

 

3. 이방인들에게 보내는 대표단 (행 15:22-35)

 

이 심의회는 이와 같은 결정에 동의했으며, 이방인 교회에 회의 보고를 편지를 써서 바울과 그의 일행 편으로 보냈다. 이 권고는 보다 우월한 기관에서 내려 보내는 “공식 교리”가 아니라, 영적인 사람들이 성령으로 인도를 받아 결론을 내린 지혜로운 제안이었다. 25절과 28절을 비교해 보자. 이 금지령은 또 하나의 다른 “율법”이 아니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유대인들과의 관계에 도움을 주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창 9:1-5 과 비교).

 

바울과 그의 조력자들이 이 보고서를 본 교회에 가져간 것은 정당한 일이었다. 결국, 하나님은 이방 사람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는 데에 이들을 사용하지 않으셨던가? 이들은 복음을 위하여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았던가? 그들은 돌아오자 전 교인들을 만나 보고하였고 그들은 이러한 결정에 대하여 기뻐하였다.

 

오늘날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 사항을 좀처럼 순종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비극이다. 사도행전의 앞 부분에 나오는 베드로를 따르며 “왕국의 도래”를 추구하는 교회들이 훨씬 많다. 다른 교회들은 “베드로와 바울을 섞으며” 율법과 은혜를, 이스라엘과 교회를 이상하게 합성한다. 우리는 “바울에게서 빼앗아 베드로에게 주는 일”을 멈추어야 할 시점에 와 있으며 이방인들에게 보냄을 받은 사도요,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선지자인 사도 바울에게 귀를 기울여야 할 때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지 않는 사람에게 선포된 저주가 있다(갈 1:6-9). “현대주의자”가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옳게 분변되지 못하고 왕국의 진리가 교회의 진리와 섞여 있는 교회들에게 이 저주가 평등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낀다.

 

4. 바울과 바나바 사이의 논쟁 (행 15:36-41)

 

형제들이 교리적으로는 일치하면서도(12절) 인사문제에서 뜻이 같지 않는 것은 슬픈 일이다. 바나바는 마가와 친척 관계이기 때문에 일종의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바울은 이 젊은이를 낙제생으로 보았다. 바울과 바나바는 둘 다 지나치게 가혹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바울은 나중에 마가를 용납했으며(딤후 4:11), 하나님은 두번째 복음을 쓰는 데 마가를 사용하셨기 때문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사역하고 있는 동안 베드로가 올라와서 이방인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다시 토론을 했다. 갈라디아서 2장 11-21절을 읽고 바나바조차도 “그 부류에 휩쓸려 들었음”을 주목하자. 바울이 그의 두번째 여행을 출발할 때 실라를 선택했던 이유도 이런 데에 있었다. 실라는 충성된 종이었다(15:22/15:32). 하나님의 종들 사이의 차이점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일이 위축되게 할 필요는 없다. 고린도전서 12장 5절에는 “행정(역사)의 차이는 있으나 주님은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