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사도행전 25장 / 베스도 앞에 선 바울
1.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함 (행 25:1-12)
24장에 나오는 재판이 있은 지 2년이 지난 후였다. 누가는 가이사랴에서의 바울의 활동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목적은 바울이 마침내 어떻게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갔는가를 설명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새 총독 베스도는 좀 더 존경할만한 인물로서, 바울에 대한 거짓 재판을 꺼려했다(16절 참조). 예루살렘을 공식 방문하는 동안에 베스도는 “많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하는 것을 보았다(24절).
대제사장과 최고 치리자들조차도 바울에 대해 거짓말을 하여,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와 재판하게 해 달라고 청했다. 이들은 도중에 바울을 죽이려는 과거의 속임수를 또 쓰고 싶었던 것이다(23:12-). 그 40인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기를 갈망하며 기다렸을 것이다.
하나님은 베스도로 하여금 유대인들의 제안을 거절하도록 인도하셨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자기의 종을 보호하셨다. 인간이 궁리를 하지만 결말은 하나님이 지으신다. 우리는 그의 정직함과 공정성을 인해 그 이방인 총독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유대인들을 10일간 방문한 후에 가이사랴에 돌아온 베스도는 바울에 대한 재판을 다시 열었다. 또다시 유대인들은 입증해 보일 수 없는 불평들을 안고 왔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로마로 보내시겠다는 약속이 성취되기를 얼마만한 인내로 기다려야 했던가! 애굽의 감옥에 있던 요셉처럼 말씀이 성취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바울은 시험을 받고 시련을 당하였다(시 105:17-20).
베스도가 지닌 “정치가로서의 기질”은 이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가기를 원하는지를 물어보는 데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도 역시 벨릭스처럼 유대인들을 기쁘게 하기를 원하였으며 새로운 총독으로서 좋은 인상을 주려 했다(24:27).
이제 바울은 로마에 관한 그리스도의 약속에 매달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몇 해전에 그리스도는 그에게 예루살렘에 머물지 말라고 말씀하셨었다(22:17-18). 지난번 선교 여행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당하게 된다는 성령의 경고에 불순종하였다.
하나님은 바울의 실수를 극복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로 전환시켰으며, 바울은 조심스럽게 예루살렘에서 떨어져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그의 종을 보호하여 로마로 데려가 최후의 몇 해를 그 곳에서 사역하도록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모든 로마 시민들은 가이사에게 호소할 권리가 있었으며 로마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었는데, 바울은 이제 이 권리를 사용하였다.
2. 바울이 베스도를 당황하게 함 (행 25:13-22)
새 총독은 이제 정말 문제거리를 책임지게 되었다. 바울은 주목받는 죄수였고, 그의 재판에는 유대 지도자들과 전 민족이 관계될 것이었다. 만일 베스도가 정직히 행하여 바울을 석방한다면 유대인의 분노를 초래할 것이었는데, 새로운 총독으로서 그는 그들의 선의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의 문제는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오면 해결될 것 같았다. 이들은 노련한 지배자들이며 정치가들로서, 아그립바는 사도행전 12장에 나오는 아그립바의 아들이었고, 버니게는 벨릭스의 아내 드루실라의 언니였다. 헤롯의 가족은 국제결혼을 하여 여러 해 동안 죄 가운데 살았다.
베스도는 바울에 관한 소송을 곧장 아그립바에게 내밀지 않고 적당한 때를 기다렸다가 이 문제가 자기에게 너무 힘들기 때문에 경험자의 도움이 필요하다는듯이 상황을 설명하였다. 이러한 접근이 아그립바의 자존심에 호소하는 술책인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베스도는 이 모든 문제를 “미신의 문제”(19절)라고 불렀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영적인 문제에 대한 이해력이 없으며, 종교란 대동소이하다고 본다. 베스도는 이 사건에 예수 그리스도가 관여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울은 예수께서 살아계시다고 말했으며 유대인들은 그가 죽었다고 말했다.
다음으로, 베스도는 아그립바가 바울의 말을 듣고 싶어하는 정말 이유를 말해 주었다. 즉, 총독은 바울을 가이사에게 보내야만 하며, 그에게 불리한 어떤 고소 사실이 없는 것이다 !(27절)
3. 바울이 왕실을 대면함 (행 25:23-27)
다음 날 의식이 장관을 이루며 진행되는 가운데 왕실 사람들이 법정에 모였다. 세상에는 만족하게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세상을 행복하게 하는 데에는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이 있어야 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겉치레와 교만에 대해서는 쉽게 싫증을 낸다. 오늘날 종교계에서 많이 사용하는 법의나 허례, 촛불, 깃발 등을 볼 때에,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성을 볼 수 없게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의아해진다.
베스도가 바울을 소개하는 말을 보자. “이 사람을 보라!” 하지만 바울은 그 모임에 참석한 어떤 위대한 사람들보다도 고상한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요, 열심있는 대사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왕이요 제사장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부유하게 만드시며 하늘의 소명을 주시고 영광된 소망을 주신다.
바울의 재판은 그리스도의 재판과 별다를 것이 없다. 관련된 모든 사람들은 그가 죽을 만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석방되어야 마땅하다고 여겼다. 수비대장 루시아는 바울에게 불리한 증거를 얻지 못했다고 말했으며(23:29), 베스도는 바울이 죽을 만한 일을 한 것이 없다고 시인하였다(25:25). 아그립바조차도 이 판결에 동의하였다(26:31). “죄목을 모르고서야 어떻게 죄인을 가이사에게 보내겠는가?”라고 베스도가 묻자, 아그립바는 바울에게 말을 하도록 허락하였다.
▣ 실천적인 교훈
바울의 생애에 있어서 “삽입 부분”에 속하는 본 장에서 우리는 몇 가지 실천적인 교훈을 발견한다. 바울은 감옥에서 2년을 기다려야만 했다. 이것은 의심할 나위 없이 로마의 감옥에서 보내야 할 그의 생애에 대한 준비였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예비하고 계신 일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킨다.
그리스도가 없는 종교는 언제나 참된 신자들을 박해한다. 바울은 직접 이러한 일을 해보았던 사람이었다(행 9장/ 빌 3장).
그리스도가 없는 종교는 사단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어디까지든 굴종한다. 이 유대인들은 그들의 종교를 주장하기 위하여 거짓말을 하고 죽이기까지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목적이 방법을 정당화한다는 이러한 태도를 받아들여서는 결코 안 된다(고전 4:1-2 참조).
구원받지 못한 정부 지도자들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사용되는 때가 자주 있다. 베스도는 유대인들을 즐겁게 하는 일과, 법을 정직히 따르는 일 사이에서 고민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계획과 유대인들의 계획을 자신의 영광을 위한 일로 전환시키셨다. 바울은 정직한 삶을 살았으므로 누구도 그를 고발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살아야 할 방식이다.
세상의 지위나 인간의 허식에 흔들리는 사람이 되지 말라. 우리는 왕 중의 왕을 대신하고 있으며, 지상의 어떤 치리자보다 높은 곳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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