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정표/핵심성경연구-신약

사도행전27 - 행 26장(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JORC구원열차 2009. 7. 16. 13:59

26. 사도행전 26장 /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1. 바울의 개인적인 설명 (행 26:1-23)

 

바울의 손은 묶여 있었으며(29절) 그가 손을 내어뻗은 그것 자체가 하나의 설교였다.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충성심으로 말미암아 묶인 위대한 사도인 바울이 여기 있는 것이다. 빌립보서 1장 13절에서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묶인바 된 것을 무거운 짐이라기보다는 축복이라고 했다.

 

바울이 왕에게 연설할 때의 정중한 예절에 대하여 유의하자. 비록 바울이 그 사람을 존경할 수는 없었다고 해도 그의 직책을 존중하였던 것이다(롬 13장 참조). 아그립바는 유대인 문제에 대해서는 “전문가”였으므로, 따라서 바울은 그가 공정하고 지적으로 들어줄 것임을 느꼈다. 다음의 핵심적인 몇 구절들에서 바울의 개인적인 변호의 내용을 요약할 수 있겠다.

 

1) 나는 바리새인으로 살았다(4-11절)-

바울의 초기 생애에 대한 부가적인 자료들을 위해서는 22장 3절 이하, 빌립보서 3장을 참조하자. 젊은 랍비로서 그는 대단히 유명하였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생활을 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은 이 모든 지위와 특권을, 그리스도를 알며 그를 위해 사는 것에 비교할 때,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했다.

 

6-8절에서는 부활의 문제를 다시 거론한다(23:6-10 참조). 하나님은 그 민족에게 왕국과 영광을 약속하셨는데, 사도행전 13장 27-37절에서 바울은 다윗과 맺어진 약속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성취되었다고 설명하였다. 만일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더라면(행 1-7장), 그들은 왕국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죽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25:19).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이스라엘에게 소망을 주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계속해서 그가 박해자요 살인자로서 있던 시기를 설명하여 그의 회심의 날에 대한 것으로 이끌어간다.

 

2) 나는 빛을 보았다(12-13절)-

바울이 경험한 것 같은 깜짝 놀랄 류의 회심을 경험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살인 계획에 관계하고 있는 동안에 바울은 하늘에서 비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물론 그는 그 때까지 영적인 어두움 가운데 있었으나(고후 4:1-6),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그에게 나타났던 것이다(딤전 1:12이하 참조).

 

3) 나는 음성을 들었다(14-18절)-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에게 죄를 깨닫게 하며 개심시킨다. 전 생애를 통하여 바울은 선지자의 음성을 들었으나, 그 날 그는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었다. 요한복음 5장 21-25절에 보면 영적 부활의 기적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바울은 단지 그리스도의 백성들만 박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을 박해했던 것임에 주목하자. 주님의 몸의 지체들로서 신자들은 주님의 고난을 나누어 가지며, 그리스도는 그들의 짐을 지신다.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가시채란 농부들이 그들의 가축을 모는 데에 사용하는 막대기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바울을 주인에게 순종하려 들지 않는 고집 센 가축에 비교하신 것이다.

 

바울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어떠한 “막대기”를 사용하셨는가? 물론 스데반의 죽음도 그 하나였으며 바울은 그 일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22:17-20). 그가 박해했던 성도들의 거룩한 행위가 바울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을 것이며, 구약 성경도 그의 마음 가운데 새로운 확신을 주었을 것이 확실하다. 바울을 회개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들을 사용하셨으며, 이러한 방법은 오늘날 주님께서 죄인들에게 사용하시는 방법이기도 하다.

 

바울이 예수께 “주님”이라고 부르자 구주께서는 “예수”라는 “구원의 이름”을 그에게 밝히셨다(롬 10:9-10 참조).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부탁하신 임무를 주의깊게 읽자. 이방인에 대한 그의 특별한 사역을 눈여겨보며, 바울의 회심에 대하여 사도행전에 나타난 다른 기록들과 비교해 보라. 18절은 구원에 대한 아름다운 설명이다.

 

4) 나는 불순종하지 않았다(19-21절)-

바울은 빛을 보았으며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마음을 열었다. 그리고는 즉각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인간의 노여움을 사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바울은 신실하였다.

 

5) 나는 이 날까지 계속해 오고 있다(22-23절)-

이 다섯 개 구절들은 바울의 생애를 분명하게 요약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를 섬길 것을 추구하는 그 누구나의 생애가 될 수 있다. 바울은 충성스럽게 계속 일했다. 마태복음 13장 18-23절에 나오는 얄팍하고 혼잡한 마음과 유사한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들은 잠깐 동안 계속 되다가 사라졌다. 그리스도께 충성된 것은 참된 구원의 증거이다. 22-23절은 바울의 간증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다. 그는 높고 낮은 사람들 앞에서 말씀에 기초하여 그리스도를 강조한다.

 

2. 바울의 열정적인 권고 (행 26:24-32)

 

바울은 “이방인”이란 단어를 말하기에 이르렀는데, 베스도가 중단시켰다. 22장 21절에 기록된 바 성전에서 유대인들이 했던 것과 똑같았다. 베스도는 그의 마음에서 바울을 비난한 것이다. 여러 해 전에 그리스도의 친구들과 친척들이 그리스도께 했던 일과도 같은 상황이다(막 3:20-21/막 3:31-35).

 

베스도는 바울이 “미친 이유”가 그의 많은 학문 때문이라고 갖다 붙였는데, 이 말은 바울이 뛰어난 사람이며 위대한 학자였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학문이 그의 말씀을 신용하지 않는 한 학문을 신용하지 않으신다.

 

사도는 아그립바에게 관심을 갖는 반면에 베스도를 무시하였다. 바울은 아그립바가 이 문제에 대한 전문가라는 점과 그가 구약 예언들을 읽고 믿는 사람이며,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사건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많은 빛을 받은 사람일수록 옳은 결정을 내리는 데 더욱 책임이 있다.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을 가질 수도 있음에 유의하자.

 

아그립바는 선지자들을 믿었지만 이 믿음이 그를 구원하지는 못했다. 아그립바의 반응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그가 진실로 죄를 깨닫고 구원을 받을 경지에 이르렀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28절에 나오는 그의 말은 엄격하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가?” 그가 죄를 깨우쳤다는 증거는 없으며, 여기서 “그리스도인”이란 단어는 경멸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의 배후에는 “나와 같은 유대인을 미움받는 그리스도인으로 만들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말을 이어받아 29절에 나오는 열정적인 호소를 하며 왕실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것을 간청한다. 유감스럽게도 “거의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과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다. 아그립바는 “거의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는” 측의 사람으로서, 말씀을 이해하였고 진리를 들었으나, 그에 대한 어떤 것도 행하기를 거절하였다. 그의 지성은 가르침을 받았고 그의 정서는 감동을 받았으나, 그의 의지는 굴복되지 않았다.

 

이 말로 재판은 끝이 났다. 왕과 그의 일행은 베스도와 함께 그 방을 떠났으며 은밀한 모임을 열어 바울이 무죄라는 데에 전원 일치를 보았다. 32절에 나오는 아그립바의 말은 로마의 재판을 구한 바울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그는 로마로 가려는 바울의 마음의 부담감을 깨닫지 못하고 불신자의 눈으로 이 상황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일은 바울을 그곳으로 데려가시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이다.

 

▣ 실천적인 교훈

 

본 장에서는 흥미로운 몇 가지의 교훈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도를 위해 언제나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을 우리의 마음에 주인으로 삼았으면 우리의 입술은 언제나 질문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벧전 3:15-16). 이 두 구절을 주의깊게 읽고 바울이 어떻게 이 구절들을 성취하는지 보자.

 

“빛을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 요한복음 5장 24절을 전도할 때에 암송하도록 하라.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설교란 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온 생애이다. 바울은 “자신을 설교”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자기의 구주이시며 생명의 주인되심을 전하였다(고후 4:5).

 

죄인들은 쉽게 설복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베스도처럼 정서적인 큰 감동을 받기도 하고, 다른 이들은 아그립바처럼 의심하고 비웃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말씀을 선포하는 데 충성을 다하자. 믿는 사람이 더러는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