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고린도후서 8장 / 주님의 일에 대한 재정적인 지원
8장과 9장은 바울이 유대에 사는 가난한 신자들을 위하여 그가 받은 선교 헌금에 대해 다룬다(고전 16:1-3/롬 15:25-28). 왕국의 계획이 사도행전 2-10장에서 효력을 발하고 있을 때, 이 유대인 신자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든 것들을 공유하며 살고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왕국에 대한 실물교습이었다. 왕국이 제쳐졌을 때, 그리고 교회가 무대에 등장했을 때 이 그리스도인 공산 체제는 사라졌고, 성도들은 가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바울은 이 사람들에게로 헌금을 가져갔다.
이 두 장은 그리스도인의 드리는 일에 있어서, 그 원리들과 약속들을 제시한다. 바울이 헌금에 대하여 지시하는 바에 유의하자.
1. 헌금은 교회로 가져와야 한다 (고후 8:1)
신약 성경에서의 헌금은 교회 헌금이다. 바울은 개별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교회들을 본보기로 하고 있다. 18-19절과 23-24절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교회이다. 그리스도인의 헌금은 교회 헌금이며, 십일조와 헌금을 하나님의 창고인 지교회로 가져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6장 2절에서 바울이 그들에게 제시한 내용과 똑같다. 그 주일의 첫날에(주일날) 신자들(주님의 백성)은 (주의 십일조와 헌금) 헌금을 교회(주님의 집)로 가져와야 한다. 고린도전서 16장 2절에 나오는 “저축하여 두어서”라는 말은 말라기 3장 10절에 나오는 “창고”라는 단어와 같은 뜻이다.
오늘날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나는 십일조를 교회로 가져가지 않고 성령께서 내게 어디로 보낼 것인가를 말씀하시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성경과 동떨어지게 지시하시는가?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실수를 범하고 있다. 즉, 십일조는 그들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또한 성령은 그의 말씀에서 십일조를 그의 창고에 가져오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이다.
신령한 헌금은 성경에 근거한 헌금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십일조와 헌금을 지교회에 내지 않는다면 그의 마음은 지교회에 있지 않은 것이다(마 6:21). 지교회 밖의 개별적인 헌금은 사람들을 높이고 그들의 인정을 받지만, 지교회는 주님을 높이고 그의 사역을 지원한다. 어떤 그리스도인의 예배에서 “우리에게 헌금을 보내 주시면 특별한 기념품을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광고할 때 우리는 그 사람들의 동기가 옳은 것인지 의심하게 된다.
2. 헌금은 마음에서 우러나야 한다 (고후 8:2-9)
그리스도인의 헌금은 영적인 확신에 의존하는 것이지 물질적인 환경에 의존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이 교회들은 가난하였고 무서운 고난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헌금을 통하여 서로 나누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이것으로는 나 자신을 지켜야 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도움을 얻게 되는 것을 즐거워하였다.
그들은 헌금을 은혜로 본다(8:1/8:6/8:7/8:9/8:19/9:8 참조). 그리스도인의 헌금은 마음에서 넘쳐나는 것이며, 온전히 거저 주신 구원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자발적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고린도 사람들은 많은 영적인 축복들로 풍성하게 되었으며(7절), 바울은 이 은혜, 곧 바치는 은혜를 나타내도록 그들에게 강권하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에 속해 있다고 고백하면서도 주님께 충성스럽게 바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본다. 믿음, 설교, 증거, 말씀 연구 등과 같은 일들이 바치는 은혜를 대신하지는 않는다.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들만을 본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본보기로 제시한다. 그리스도는 얼마나 풍부하신 분으로서, 얼마나 가난하게 되셨는가! 상세한 내용을 빌립보서 2장에서 찾아보라. 준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전 생애와 사역을 주는 일에 사용하셨기 때문이다.
3. 헌금은 비례적으로 측정되어야 한다 (고후 8:10-15)
고린도 교회에서는 한 해 전에 헌금을 제안하였고 기꺼이 헌금에 참여하도록 광고하였다. 디도는 이 계획을 시작에 옮기는 일을 도왔는데(6절) 이제 바울은 그들이 시작한 일을 끝내도록 권고하고 있다. 십일조를 바치기로 약속하고 열외로 떨어져 나가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이 다른 채무 관계에도 이러한 자세를 취한다면 옥에 갇히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바울은 비례적인 헌금의 원리를 분명하게 펼치는데, 그 원리의 내용은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하신 대로”라고 제시했던 고린도전서 16장 2절에서와 같다. 십일조는 바치는 일에 있어 가장 정당한 방식이다. 십일조는 사람의 것을 훔쳐가는 것이 아니며,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게 똑같이 정당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바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도록 허용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정해진 몫이 아니라 비례이다. 이 계획에 있어서 “동등해질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 십일조인 것이다(14절).
바울은 출애굽기 16장 18절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이 순종할 때 축복하셨던 것같이, 바치는 일에 있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축복을 받게 될 것임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바쳐야 할 마땅한 분량을 드린다면, 100의 10%를 바친 그리스도인보다 500의 10%를 낸 사람에게 더 축복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십일조를 반대하는 사람은 바치는 일에 있어 유일한 공정한 방식을 반대하는 것이다.
4. 헌금은 정직하게 다루어야 한다 (고후 8:16-24)
바울은 이 선교 자금을 오용하는 일로 그를 비난하는 사람이 없도록 신경을 많이 썼다. 그래서 그 교회로 하여금 이 돈을 관리할 세 명의 대표들을 지명하도록 했다. 지명된 사람들은 디도(16-17절)와 다른 형제와(18-19절), 또 다른 조력자(22절)였다. 이 일은 사무를 잘 처리한 것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 조직체들이 재원을 비사무적인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모든 돈은 영수 처리가 되고 기록되어야 한다. 이 재원은 두 사람 이상이 회계해야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이 이것을 오용하거나 또는 돈을 취급하는 데 있어서 부주의하여 그의 능력과 간증을 잃는 일이 많다.
20-21절은 이 부분의 중심 구절이다. 하나님이나 사람에게 어떠한 고발의 기회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이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아신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며, 대적에게 부정직하다는 고발을 당할 기회를 주어서도 안 된다.
어떤 사람들은 지교회에서 기록을 하고 봉투를 사용하며 영수증을 주는 것이라면 “신령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진리에서 거리가 멀다. 만일 영수증을 받지 않는다면 십일조와 헌금이 결국 교회로 들어가고 있는 것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마음으로부터 정직하게 내려는 사람은 봉투를 사용하는 것이 사무적이고 정돈된 방식이므로 이를 사용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내가 내는 것을 알 권리가 없기 때문에 난 봉투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도 전혀 내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나는 내가 보험증서나 세금고지서 같은 것들에 돈을 지불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치는 사실을 숨겨야 하는가? 바울은 이러한 헌금들이 적절하게 존중을 받아야 하며 적절하게 취급해야 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했으며, 지교회 안에서 우리도 이같이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혼란을 지어내시는 분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나 교회에서는 재정적으로 건전하지 못한 사역들에 돈을 지원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필요한 데가 있다”는 사실이 헌금의 충분한 동기가 되지는 못한다. 그 돈이 정직하게 처리되며 지혜롭게 사용된다는 증거가 있어야만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의 사역들이 하나님께서 인준해 주신 일이 없는 계획에 돈을 낭비한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일들을 지원할 의무는 없다. 내가 꾸지 않은 빚을 갚을 필요는 없다. 성경적이라는 점 외에도 교회에 내는 것이 가장 좋으며 안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목회자와 집사들은 사역들을 조사하여 그 사역들이 얼마나 건전한지 알아볼 수 있다. 목회자는 본 교회에서 필요한 경우를 알고 있으며 어떤 사역이 가짜이며 어떤 사역이 진실한 사역인지를 알고 있다. 만일 지도자들을 신뢰한다면 교회는 그들을 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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