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정표/핵심성경연구-신약

갈라디아서1 - 개요 및 서론 / 갈 1장(참된 복음을 향한 바울의 태도)

JORC구원열차 2009. 7. 23. 23:39

갈라디아서 개요

 

▣ 주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의 충족이다.

 

1. 개인적인 내용 : 은혜와 복음 / 갈 1-2장

 

바울의 메시지로 선포된 은혜 /1장 1-10절

바울의 생활 중에 드러난 은혜/1장 11-24절

바울의 사역을 통해 보호된 은혜 /2장 1-21절

-교회 지도자들 앞에서 집단적으로/2장 1-10절

-베드로 앞에서 개인적으로/2장 11-21절

 

2. 교리적인 내용 : 은혜와 율법 / 갈 3-4장

 

바울은 구원이 율법을 지킴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님을 입증한다.

경험에서 비롯된 개인적인 논점/3장 1-5절

성경적인 논점-아브라함의 믿음/3장 6-14절

논리적인 논점/3장 15-29절

경륜적인 논점/4장 1-11절

정서적인 논점/4장 12-18절

풍자적인 논점/4장 19-31절

 

3. 실제적인 내용 : 은혜와 그리스도인의 삶 / 갈 5-6장

 

속박이 아니라 자유/ 5장 1-15절

육체가 아니라 성령/ 5장 16-26절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6장 1-10절

인간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6장 11-18절

 

 

갈라디아서 서론

 

▣ 배경:

 

고대 고울지방(Gaul, 현재의 프랑스)은 호전적인 종족들로 민족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들은 기독교 세계가 열리기 수 세기 전에 유럽을 거쳐 소아시아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갈라디아”라고 불리우는 나라를 세웠는데, 이는 “고을 사람들의 나라”라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기 약 4반세기 전에 로마인들은 갈라디아를 그들의 거대한 영지 중의 하나로 복속시키고, 그 전 지역을 “갈라디아”라고 불렀다.

 

달리 말해서, 바울 시대의 “갈라디아”라고 하면 작은 나라로서의 갈라디아인지, 아니면 넓은 로마 영지로서의 갈라디아 지방을 말하는 것인지를 구분하여야 한다. 말하자면, 누군가 “나는 뉴욕으로 가는 중이야”라고 할 때, 뉴욕 주인지, 아니면 뉴욕 시인지를 분간해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 문제가 갈라디아서를 연구할 때에 대두된다. 바울은 이 강력한 서신을 갈라디아라는 나라에 있는 교회들에게 쓴 것인가, 아니면 갈라디아라는 로마의 지방에 있는 교회들에게 썼는가? 성경 뒷부분에 있는 사도 시대의 지도를 펴서 관련된 범위를 확인해 보라. 오늘날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갈라디아지방의 교회들, 즉 그가 1차 전도 여행시에 설립한 교회들에게 편지한 것으로 본다(행 13:1-14:28 참조).

 

다른 말로 하면, 그는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쓰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갈라디아서가 바울이 쓴 최초의 서신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그의 사역의 말기에서와 같이 초기에서도 바울에 의해 명백하게 제시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 주제:

 

사도행전의 서론과 15장에 대한 설명을 복습한다면 유익이 될 것이다. 그러면 사도행전의 앞 부분에서 베드로와 열 두 제자에 의해 왕국에 관한 메시지가 제시되었음을 상기하게 될 것인데, 유대인들에게 메시야의 왕국이 세번째로 제시되었을 때 그들의 대답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것이었다(행 8장). 사마리아 사람들과(행 8장) 이방인들에게(행 10-11장) 메시지가 전달된 것이 바로 이 때였으며, 이 두 사건 사이에 바울이 구원받았다(행 9장).

 

바울에 와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행하고 계신 것과, 왕국의 예언 계획을 교회에 대한 비밀 계획이 임시적으로 대신하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신자들 중의 한 무리는 계속 유대의 종교에 충실하여, 이 놀라운 은혜의 새 계획과 은혜의 메시지를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둘 다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마침내 예루살렘에서 이 문제가 대두되어 논쟁을 하게 되었는데(행 15장) 신자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 오늘날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그의 이름을 위한 백성을 이방인들 중에서 불러내는 것이다.

- 바울은 몸된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사도였다.

- 왕국 프로그램은 몸(The Body)이 완성되면 다시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순전한 은혜의 메시지를 받지 않으려는 유대인들이 있었으며 은혜와 율법을, 왕국의 메시지와 교회의 메시지를 섞으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유대주의자”라고 불리워졌는데 그들의 목표는 이방인 신자들을 유대의 제도들로 꾀어 들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믿음에다 율법을 지키는 일을 더해야 구원을 받으며, 믿음에 더하여 율법을 지켜야 성화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교사들이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을 방문하여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려 놓고 있었다(갈 1:6-3/ 갈 3:1/갈 4:8-11/갈 5:7-9/갈 5:7-9/갈 5:12/갈 6:12-13). 이들은 신자들이 종교적인 성일을 지키고 할례를 받는 등의 일을 하기를 원하였다.

 

이것은 바울이 갈라디아서 1장 6-9절에서 정죄한 바, “다른 복음”이었다.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시대의 전환이 있기 전에는 이 복음이 정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의 등장과 더불어 한 몸으로서의 교회에 관한 진리가 밝혀짐에 따라 이 복음은 그릇된 복음이 되었다. 오늘날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축복하시는 유일한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다.

 

▣ 오늘날의 가치:

 

갈라디아서는 율법주의에 반대하는 하나님의 가장 강력한 말씀이다. 육신은 종교적인 일, 곧 성일을 지키고 예식들을 집행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선한 일을 하려고 시도하는 등의 일들을 행하기를 좋아한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종교체제들이 율법과 은혜를 혼합하고 있으며, 왜곡되고 혼란한 구원의 길을 들어 실제로는 속박의 길을 제시하는가!(갈 2:4/갈 4:9/갈 5:1) 안식일을 지키고, 식물 금기법과 지상의 제사장 직분, 성일, 규례를 지키는 것 등, 이 모든 일들이 갈라디아서에서 일소되고,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가지게 된 영광스러운 자유가 대신한다.

 

 

1. 갈라디아서 1장 / 참된 복음을 향한 바울의 태도

 

처음의 두 장은 사적인 내용이며, 핵심이 되는 단어는 “복음”으로서 1장의 45개 구절 중에 10회나 나온다. 바울의 목표는 그의 복음과 사도로서의 소명이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온 것이며, 사람들에게서 온 것이 아님을 밝히는 것이었다. 바울은 베드로에게서 배운 바를 간접적으로 전파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와 바울이 서로 떨어져 일하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방법을 취하셨다. 그렇지 않았다면 은혜와 한 몸(One Body)에 관한 놀라운 메시지는 열 두 제자들이 전한 왕국 메시지와 더불어 혼란을 일으키게 되었을 것이다.

 

1. 바울이 그의 복음에 대하여 알림 (갈 1:1-5)

 

유대주의자들은 갈라디아 사람들을 꾀어(3:1) 바울의 사도권과 메시지가 믿을 만하지 못하다고 말하고 있었는데, 예루살렘과의 적절한 관계를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들은 인간의 승인이 마치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이기나한듯 “우리는 베드로로부터 온 천거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을 것이다.

 

바울은 이 편지를 시작함에 있어 그의 메시지와 사역은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주장하였다(1, 12, 17절에서 바울이 사용한 “... 도 아니요... 도 아니다”라고 한 말을 주의해서 보자). 그는 즉각적으로 자신이 전한 복음을 똑똑히 설명한다.

 

바울의 복음은 모세나 율법에 중심을 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곧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지내심, 부활에 중심을 두고 있다. 이는 평화를 가져온 은혜의 복음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건지시려고...”하셨던 자유케 하는 복음이었다.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을 통하여 교회를 속박으로 인도해가고 있었다(2:4/3:13/4:9 참조).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이러한 악한 시대에서 우리를 구원하였으며 자유 안에서 새로운 지위를 주셨다(5:1- 이하). 바울이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라고 첨부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복음의 내용과 의도에 관하여 혼란을 일으켜서는 안 되겠다. 복음은 그리스도를 따라 그의 생애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가 당신을 자유롭게 하시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복음에는 율법을 지킬 것에 대한 여지가 없다.

 

2. 바울이 그들의 변동에 대해 경악함 (갈 1:6-10)

 

두 가지 일들이 바울을 경악케 하였다. 곧, 구원의 축복을 경험한 직후에(3:1-5) 이들은 다른 멧세지로 돌아섰으며,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하여 고난을 당한 그(바울)에게서 이탈하였다. “떠났다”는 단어는 “떠나고 있다”는 말로 번역되었어야 한다. 그 당시 이들은 단순한 은혜에서 떠나 은혜와 율법의 혼합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5장 4절에서 바울은 “너희가 은혜에서 떨어졌다”고 말한다. 이 말은 구원을 잃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은혜의 영역에서 율법의 영역으로 이동해 갔다는 뜻이다. 은혜란 나의 필요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의존한다는 뜻이며, 율법이란 문제들을 나 스스로 처리하며 나 자신의 힘으로 다루려고 노력한다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이제 강력한 말로 어떠한 “다른 복음”도 정죄한다. 그 전하는 사람이 어떤 설교자이든 상관없이, 천사들이라 할지라도 정죄한다고 말한다. 성경에는 많은 “복음”(좋은 소식)이 나오는데,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은 바울이 전한 것 하나뿐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아브라함은 그의 씨를 통하여 온 나라를 축복할 것이라는 “좋은 소식” 곧 “복음”을 믿었다(3:8).

 

각 시대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계시하신 어떠한 약속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았다. 노아는 홍수와 방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아브라함은 약속된 씨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 바울의 등장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진리가 출현한 이래로는 다른 복음은 없다. 마태복음 3장에서 사도행전 7장까지에서 전파되었던 왕국의 복음도 더 이상은 받아들일 만하지 못하다.

 

3. 바울이 자신의 사역을 논함 (갈 1:11-24)

 

이 구절들에서 바울은 자신이 열 두 제자와 예루살렘 총회에 대해 어떻게 완전히 독립적인지를 보여 주려 한다.

 

1) 그가 전하는 복음을 그리스도로부터 개인적으로 받음(11-14절)-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고(행 9장)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자기의 사명과 메시지를 받았다. 이 일은 그에게 사도로서의 자격을 부여하였다. 바울이, 사도행전 1장에서 유다를 대신하여 열 두 사도가 되었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하나님은 바울이 그 열둘에게서 떨어져 있도록 보호하셨다.

 

아무도 바울이 자기의 메시지를 만들어 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교회의 친구가 아니라 교회의 박해자였었기 때문이다. 그의 생애는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후 급진적으로 변화하였다. 이처럼 현저한 전환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일뿐이다.

 

2) 사도들과 분리되어 그 복음을 받음(15-17절)-

하나님은 결코 바울이 열두 명에 속하게 하지 않으셨음을 다시 밝혀 두자. 그들의 사역은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며 왕국과 관련된 것이었으나, 바울의 사역은 이방인들에 대한 것으로서 한 몸인 교회의 비밀과 관련된 것이었다.

 

열둘은 이 땅에서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들의 메시지는 이 땅에서의 소망을 이스라엘에게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하늘에서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의 메시지는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갖는 “하늘의 부르심”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열두 지파와 연관하여 열 두사도가 있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상징하는 한 사람(이방 시민권을 가진 한 유대인)이었다.

 

바울은 소명을 받은 후에 사람들과 의논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즉시로 열 두 사도들과 합류했더라면, 사람들은 바울이 그들에게서 메시지를 빌려 왔고, 그들에게서 권위를 받았다고 말할 거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묵상하고 연구할 시간을 갖도록 바울을 아라비아로 보내셨다. 어떤 이들은 “바울이 아라비아에 율법과 선지자(구약 성경)를 가지고 가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가지고 왔다”고 얘기한다.

 

그보다 앞서서 모세와 엘리야가 그러했듯이, 바울은 자기의 삶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을 붙잡고 씨름하기 위하여 사막으로 갔다. 그리고나서 그는 그가 최초로 그리스도를 증거했던 곳인 다메섹으로 돌아갔다.

 

3) 그가 전하는 복음이 교회들에게 인정받음(18-24절)-

그 곳의 신자들은 사실상 바울을 두려워하여, 바나바가 아니었더라면 바울은 결코 영접을 받지 못했을 것이었다. 이 말 자체가 또한 바울이 인정받기 위하여 예루살렘 교회에 기대지 않았음을 입증한다. 이러한 방문이 있은 후에 그는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가서 사도행전 11장 22-30절에 기록된 바와 같은 사역을 하였다.

 

그는 유대에 있는 신자들에게 개인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곳의 교회들은 그의 회심에 관한 놀라운 소식을 들었으며, 하나님께서 바울 안에서, 그리고 바울을 통하여 행하신 일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오늘날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 바울이 나타낸 바를 거절하고 율법과 은혜를 혼합하려 하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다. 그들은 왕국에 대한 계획이 여전히 작용하고 있던 사도행전의 앞부분에 바울을 “끼워 맞추려” 하였다. 그들은 바울에게서 훔쳐다가 베드로에게 주려고 하였다. 우리는 단순한 은혜의 메시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교회와 왕국, 은혜와 율법, 그리고 베드로와 바울을 혼합시키려는 것은 혼란을 빚어내는 일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는(변하려, 1:7)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