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양육 자료실/십자가를 아십니까?

서론 - 하나님 나라로서의 교회

JORC구원열차 2009. 9. 22. 21:41

십자가를 아십니까?  (이근호)

출처 : crossvallige.org

 

머리말

 

누구나 멀미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구토하고 싶을 때가 있다. 주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거짓 교회는 필히 토해 내치겠다고 하셨다(요한계시록 3:16).

 

한국 교회는 너무 오랫동안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 고집에 진절머리가 난다. 십자가도 없으면서 십자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붕 위에서 버젓이 걸려 있는데 그 안에는 십자가를 치워 버렸다.

 

이러고서도 교회라고 간판은 걸어 놓고 있다. 십자가가 다시 교회 안으로 들어올까 봐 경계하며 벼르고 있다. 복음을 아는 자는 누구든 상관없이 추방시키고 있다. 그 대신 신변잡기를 미끼로 하는 '사람 몰이꾼'을 강단에 올려 세웠다. 어설픈 윤리 선생이 시류에 따라 윤리 강의나 하고 있다.

 

십자가를 없애 버린 교회는 완전히 교회가 아니다. 십자가가 빠진 상태의 교회는 종교적인 사교 모임에 불과하다. 거기서 집회 때마다 거짓말만 흘러나온다. 이래서 교계는 거짓말만 유통하고 있다.

 

인간들의 즐거움 대신 십자가를 도로 꽂아야 한다. 십자가는 건물 앞면을 장식하는 비품이 아니다. 성도의 모임, 한 복판에 꽂혀야 한다. 예배의 즐거움 대신 십자가 만이어야 하고, 어수선한 전도 바자회 대신 십자가 만이어야 한다. 세상이 통일을 희망할 때, 성도는 십자가만을 그리워해야 한다.

 

환상의 오색 테이프가 한국 교회를 덮치고 있다. 거짓 교회가 교계의 대세를 차지한 것 같다. 그래, 차지하라! 사람의 영혼들을 장악하라! 그러나 절대로 십자가, 그 자체만큼은 장악하지 못할 것이다. 아직 십자가 정신이 남아 있는 한 교회는 여전히 있다. 이 십자가를 공부해 보자.

 

실질적으로 세상은 무엇을 중심으로 하여 돌아가나? 이 물음은 대단히 중요하다. 만약 그 중심을 모르게 되면 그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배제된 자이다. 하나님 활동의 중심을 모르고 인생을 살아왔기에 한평생 하나님의 일에 방해꾼 노릇만 한 셈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일에 나서서 활동했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한 일의 결과는 어디까지나 자기의 생존을 위해 자아를 바친 것으로 판명 난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중심으로 살아왔으면서도, 교회라는 종교단체의 일에 종사했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산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본 글은 하나님이 세상을 향하여 일하시는 중심을 분명히 보여줌으로서, 정말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과 인간 중심으로 사는 것 사이의 차이성을 보여주고자 쓰여졌다. 그리고 그 차이성을 극복할 수 있는 것도 인간의 소관이 아님을 밝히려 한다.

 

인간이 살아오면서 발휘한 그 어느 행위도 자아를 변화시켜 주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타인을 향하여 베푼 그 무슨 자비의 손길도 그 상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의 중심을 모르게 때문에, 매사를 자기가 나서서 처리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들이 지상에 쏟아놓은 것은 탐욕의 부분들이다. 그리고 희망 없는 희망뿐이다.

 

막연한 염원들을 한데 집결시켜 스스로에게 위안의 지성소 구실을 했던 교회 내의 활동들,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 때가 되었다고 본다. 전혀 알맹이 없는 낭설을 가지고 복음이라고 외쳐대며 군중을 사로잡기를 고대하는 의식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무지가 가득 들어 있다.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고 해서 그들을 이용하거나 사로잡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자기중심으로 사는 그들로부터 오해를 받는 수가 있더라도 값싼 복음을 회수하고 그들의 죄를 지적해 내는 복음을 보여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예를 들어, 구약 욥기에 보면, 욥의 친구들과 욥의 논쟁에서 근원적으로 욥의 친구들이 진리 규명에 실패하고 있는 것은 세상을 '고난' 바탕 위에서 해석해 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 비해 욥은, 주님이 주신 고난을 바탕으로 세상을 읽고 있다. 끝에 가서야 욥의 해석이 올바른 것임이 드러난다(욥기 42:7).

 

모든 세상 지혜가 다 몰려들어와 우월을 가리는 욥기에서 최종 승리는 고난자의 몫이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본 글은, 십자가의 의미가 하나님 활동의 중심 취지임을 밝히고, 참 신앙생활은 이 중심이어야 함을 증언하고자 쓰여지게 된다. 십자가 정신을 보이지 못하는 신앙은 본질부터 하나님이 주신 신앙이 되지 못한다. 동시에 구원도 보장받지 못한다. 그저 취향에 맞는 종교 중의 하나를 가지고 살았을 뿐… ….

 

 

서론 - 하나님 나라로서의 교회

 

복음을 쉽게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받곤 한다. 그러나 어떻게 복음이 쉬울 수가 있는가? 개개인마다 종교성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 종교성을 요리조리 피해가면서 복음만이 심령에 정착되도록 하려니 정말 어렵다. 종교와 복음을 혼동하고 있는 자들에게도 납득되는 복음은 없다.

 

복음의 외부적 성격은 이 세상을 나무라고 급기야는 심판하겠다는 소식이다. 심판의 대상은 이 세대이다. 어떤 사적인 개인에게 감정이 있는 게 아니라 이 우주 전체에 대해서 하나님은 분노하고 계신다.

 

거기에 비해 종교성이란, 인간의 자유의지론에 입각해서 자기 스스로의 이해력에 의해 구원을 출발하겠다는 발상이다. 신약성경은 우주론적인 기독론으로 충만해 있다(에베소서 1:18-23). 구속이든 구원이든 더 이상 개인의 자질과 능력에 속한 문제가 아니다.

 

그 어떤 인간도 자기를 붙들어 매고 있는 세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실존이다. 개인의 자유의지와 구원은 상호 연결될 수 없다. 모든 인류는 그 누군가에 완벽하게 매여 있다고 한다. 신약성경은 개인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시작한다.

 

올바른 교회란, 인간들의 종교적 욕구를 채워 주는 데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데이다. 만약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무지하다면 이는 사이비 교회로 향하는 길목이다. 개인의 욕망과 '하나님 나라'라는 하나님의 계획은 상호 배타적이다.

 

그 이유는 현재 개개인이 자기를 사로잡고 있는 악한 영의 하수인들이기 때문이다. 그 악한 영은 개인에게 악마의 심성을 담아놓고 있는 실정이다. 인간은 악마의 대리인들이다. 이 악마의 대리인들이 교회라는 것을 건설하고 나면 그 교회 안에서 철저히 '하나님 나라' 정신과 꼭 반대 현상이 벌어진다.

 

따라서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참다운 교회인가 아니면 악마의 성전인가 하는 것을 가려내기 위해서는 먼저 신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 나라' 정신을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천국, 혹은 하나님 나라의 정신은 예수님이 산 위에서 잘 말씀하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천국이 저희 것이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구약 시편에 자주 등장하는 말로써, 하나님 언약과 약속은 준수한다는 이유 때문에 원수로부터 이유 없는 학대와 핍박을 받는 것을 뜻한다.

 

시편 1편에 보면,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복 있는 자이다. 그의 끝 운명이 괜찮아진다. 거기에 비해 말씀에 어긋나는 악한 자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아서 실속이 없고 끝이 좋지 않다. 결국 복을 받아 심령이 가난하게 된 자는 이 지상에서 낮아진 모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 어두운 세대의 원칙과 삶의 법칙과는 하등 상관이 없고 오히려 멀리 소외되어 있다.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을 가는 자이다. 뺨을 맞아도 대항하기는커녕 다른 뺨도 돌려대어야 한다. 원수에 대해서 복수의 칼날을 갈기보다는 원수까지 사랑해야하는 것이다. 보물을 땅을 쌓아두지 않는다.

 

진정한 보물은 땅에 없기 때문이다. 하늘을 유일한 보물 창고로 여기는 자이다. 이방인들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해서 우려의 축적 행위를 하지 않는다. 창고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지상의 재물이나 돈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다. 또 땅위에서 살면서 사람들에게 존경과 우대와 칭찬을 기대한 구제나 금식이나 기도 행위를 하지 않는 자이다.

 

은밀히 보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에게만 신경 쓰며 산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인해 애매한 고난을 받는 자이다.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고생은 마치 옛날 선지자들이 당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하나님께서 받아주시는 것을 알고 있다.

 

고난당한 선지자의 예언 행위는 그 내용이 예수님의 수난 가운데서 완성되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예고한 선지자에 대한 수난과 예수님의 고난과 성도의 고생이 같은 이유에서 발생되는 정황에서 하나님은 이 세대를 멸망시켜도 좋은 근거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나라란, 이 현실에서는 이 세대로 인해 철저하게 수난 받는 모습으로 비치게 된다. 이 세대와 비교된 채로 보여지는 하늘나라의 본질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갖가지 비유 설교 가운데서 설명된다.

 

씨뿌리는 비유에서, 하나님 나라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공격받는다. 말씀을 빼앗아 가는 마귀가 있는가 하며는, 잠시 복음의 기쁨은 있으나 환난을 받아 넘어지기도 하고 재리의 유혹과 세상 염려로 기를 못 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기어이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이다. 비록 밭에 가라지가 있다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는 기어이 그 부정적인 것을 천사를 보내어 제거하신다. 또 포도원비유에서, 주인이 길거리에 나가서 길거리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을 데리다가 자기 농장에서 작업케 한다.

 

하루해가 지고 노임을 지불하는데 오전에 온 사람이나 오후에 온 사람이나 품삯을 같이 지불한다. 이 세대 원칙에 의하면 반발하는 것이 당연하다. 무노동 무임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니다. 똑 같이 노임을 지불했다.

 

그런데 그 노임은 일꾼들의 노동의 댓가가 아니었다. 그들은 애처부터 놀던 자이기 때문이다. 이 노임은 주인의 은전이며 은혜의 베풂이었다. 바로 이 법칙만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교회 안이어야 한다. 교회 봉사의 관심 있고 열성을 보인 교인들이 만약에 대노하여 반발한다면 그 사람은 천국과 관계없는 종교 집단에 와있는 것이다.

 

교회 봉사를 전혀 안하게 되면 어떻게 교회를 운영시킬 것인가에 걱정이 되는 목사나 장로가 있다면 그 사람들도 역시 딴 동네에 존재하는 자들이다.'천국은 이와 같으니'라고 하신 주님에게 교회적으로 반발해서는 교회가 아닌 게 된다. 교회를 시험하고 측정하는 것은 천국밖에 없다.

 

또 다른 비유에 보면(누가복음 14장) 이번에는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었다. 많은 사람을 청했지만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아니했다. 초청한 사람은 자기 영광을 위하여 그들이 참석해주기를 원했지만 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자기 생각에만 몰두했다. 주인은 종들에게 명하여 가난한 자와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한다.

 

이것은 먼젓번 초청자들과 비교하기 위함이다. 즉 어떤 자가 천국 잔치에 합당한 자인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들이 잔치 자리에 들어섬으로 먼젓번 자리 주인들을 나무래고 공격하게 된다. 장가 갈 처지도 못되고 소를 살 입장에도 끼지 못하고 밭 주인이 될 공산도 전혀 없는 그들은 그들의 [못남]이 선행은 아니다.

 

그러나 소위 [잘 난자]에 대한 주인의 나무램의 정당함을 분명히 보여주게 된다. 이들은 주인의 강권으로 자리를 메꾸었던 자들이다. 주인의 일방적인 선택이 잔치 자리를 빛냈다. 이것을 가지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 잔치'라고 하신다. 자기의 선행은 항상 경계선이 있기 마련이다.

 

이 경계선을 스스로 극복하고 천국에 올 자는 아무도 없다. 오직 은혜의 초청, 그것만이 천국을 구성한다. 따라서 천국은 세상 나라의 반대이다. 항상 주인 쪽에서 시작한 나라이다. 그 주인이 제공된 은혜의 강권성이 천국의 자리는 메우어지게 한다. 그러기에 그 자리 자리마다 인간의 공적인 깔린 여지는 없는 것이다.

 

누가복음 9:46-48에 보면, 세상 나라와 또 다른 하늘나라의 모습이 나온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자인가에 대한 토론이 일어났다. 큰 자에서 시작해서 작은 자까지 한 줄로 죽 세워보고 싶은 충동이 세상 나라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세상적 의식을 미리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제자들 앞에 세우셨다.

 

그리고 말씀 하신다.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자가 가장 큰 자니라" 평소에 사람들이 큰 자 되기를 얼마나 소원하고 있는가. 혹시 자신이 작은 자로 미끄러질까봐 늘 노심초사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신다. 이점에 대해서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바르게 소개할 필요를 느끼셨다. "이 작은 어린 아이가 가장 큰 자가 된다". 하늘나라는 세상 나라와 정반대였던 것이다. 가장 작은 자가 가장 큰 자가 되는 것을 제자들은 배워야만 했다.

 

누가복음 15장의 세 가지 비유에서도 한결같이 이 세상에서 [잃어버림을 받은 경험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첫번 비유는 1마리의 양만이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 양이고, 두 번째 비유에서는 하나의 동전만이 잃어버린 경험자이고 그 다음 비유에는 둘째 아들만이 아버지를 잃어버린 경험을 지니게 된다. 즉 잃어버렸다가 되찾게 된 과정 속에서 세상 나라의 속성과 정반대는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하나님을 잃어버린 적이 없다고 자부하고 있는 그 당시 종교인들에게 대한 공박이다(누가복음 15:2). 예수님의 일생은 이처럼 이 세대가 주는 반복되는 공격 가운데서 [고난]을 뿜어내면서 천국을 소개하고 있다. 그 모든 공격의 핵심부는 돈과 재물과 권력을 소지한 계층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이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 것이라"라고 하셨다(누가복음 16:15).하나님 나라의 정신, 그것은 주님을 따라서 이 세상을 포기하는 사고방식이며 외형적으로는 고난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바로 이것이 교회이어야 하지 않는가?

 

그래야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말한다. 교회가 꼭 거부해야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이 세상에서 발생된 종교성이다. 종교와 복음을 혼동하고 있는 이상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반드시 합세하게 된다. 그 이유는 종교가 이 세상을 대표하는 또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교회를 성장시키려고 하는 것은 이 세상 나라를 긍정하는 것이고 동시에 하늘나라를 거부하는 몸짓이다. 교회를 성장시켜주는데 동원될 복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복음은 이 세상 어느 한구석도 저주의 대상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종교단체를 죽인다. 그래서 교회만 멍청하게 바라보며 생활하는 자 앞에서 더 이상 예수님은 대화하지 않으신다.

 

그 사람에게 복음이란 곧 교회의 건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살 수 있는 길은 교회와 함께 자기 자신이 죽은 길밖에 없다. 사람은 동시에 두 곳을 쳐다볼 수 없다. 정말 하나님 나라 사상에 물들어있다면,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여기는 모든 종교적 행태를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만 생각할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교회라고 한다. 자기 자신이 복음을 선택하기 이전부터 복음이 오히려 자기를 가져갔음을 인식하는 자들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가 된다. 복음은 본인들을 죽였으며 전혀 딴 인간으로 자기들은 살려주고 있음을 그들은 알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그 나라는 주님의 세계였다. 나의 세계를 전혀 용납해주지 않는 세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노력으로 홀로 완성된 세계이기에 오직 그리스도 이외는 그 어떤 존재할 고유의 영역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 하나님의 나라의 출입구는 하나뿐이다. 십자가, 그 십자가를 지금부터 전하려고 한다. 구원은 능력은 오직 십자가뿐이기 때문에 딴 것은 전하려 하질 않겠다(고전1:18/2:2).

 

과연 무엇이 복음이 십자가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했던가? 그것은 이 세대를 자랑하고 있는 여러 가지 종교적 테크닉과 비교해 보면 투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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