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십자가와 전도
전도란, 도를 전하는 것이다. 도란 십자가의 도를 말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린도전서 1:18).
이 십자가를 전하지 않는 것은 전도가 아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죽음의 사건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전한다는 것은 인간들의 죄를 낱낱이 들추어낸다는 말이다. 십자가 앞에서 의인은 없다. 아무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십자가 앞에서 회개해야만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 않다.극히 소수만 십자가 앞에서 회개를 한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을 새로운 계약으로 삼으셨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누가복음 22:20).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할 때 약속을 통해서 구원하신다.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의 약속은 예수님의 피이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시지 않는 사람은 영생이 없다(요한복음 6:53-57). 따라서 전도는 예수님의 피를 내용으로 하여야 한다.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고 전해야 한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방법은 날마다 성만찬 한다고 되어질 일이 아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뛰어들어 실제로 같이 죽고 같이 살아나야 한다.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는 예수님 안에 존재해야 한다. '예수 안에서'라는 성경의 표현은, 지금 예수님이 세상을 향하여 표현하고 있는 양태 속에 같이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다. '예수 안'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경계로 해서 안과 밖이 서로 나뉘어진다는 것이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예수님을 알지만 예수 밖에 있는 자는 예수님을 모른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안에 있는 자를, 예수님 밖에 있는 자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예수님 밖에 있는 자에 대해서 예수님 안에 있는 자는 결별을 선언하게 된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라디아서 6:14). 여기서 인류가 두 부류로 갈라지는데, 이 대 균열의 칼은 십자가이다.
십자가가 중심이 되어 서로가 서로를 볼 때, 맞은 편에 있는 자는 죽은 자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양쪽 다 죽음을 뜻하는 십자가를 통해서 상대방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믿는 자는 이미 세상 생활을 포기한 사람들이다.
사실은 세상 생활을 포기했다기보다는 세상을 보는데 있는 현 세상의 멸망의 이유를 찾는 것으로 생활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저주의 대상인 세상에서 영광을 얻겠다든지 성공이나 출세를 목표로 인생을 투자하지는 않는다.
예수님 밖에 있는 자를 볼 때에, 영생과 천국을 포기한 죽은 시체와 같이 보인다. 그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음의 세상을 영원한 본향처럼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는 게 보인다.
이처럼 이들을 갈라놓은 것이 예수님의 죽음이고 또 서로가 죽은 자로 간주되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완전 차단되게 된다. 전도란, 바로 서로의 세계가 이미 완전 차단되었다는 그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십자가가 예수 안에서와 세상을 극명하게 분리하는 기준이 된다면, 처음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정황을 살펴봄으로서 예수님의 적대세력을 명확하게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유대인들 손에서 발생되었다. 예수님의 죽음은, 유대인들의 사고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성경대로 메시야 오기를 소원했다. 그런데 그 메시야는 실제적으로 이 지상에서 국가 형태를 지닌 이상 나라를 건설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유대인들 앞서 다소 모호한 인물이 한 사람 등장했다. 사실 로마라는 외국의 압제 상태를 지긋지긋하게 여기던 판국에 누구라도 메시야적인 희망을 몰고 오는 사람이라면 일단 대중의 주목을 받는다. 유대인들은, 자기 나라가 옛날 다윗왕국처럼 번창되고 안정된 나라이기를 바란다.
그런데 선지자들의 예언에 의하면, 그 다윗 왕, 혹은 다윗 가문에 속한 사람이 다시 온다는 것이다(에스겔 37:24-25). 물론 실질적인 왕은 하늘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렇게 되면 유대 나라에 와서 온갖 못된 짓을 일삼는 원수들은 다 일소해 버릴 것이고 세상 위에 군림하여 세계를 다스리는 왕같은 국가가 될 것이다.
민중들에 예수님을 따라 다닌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 인물에게는 로마 군대가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하는 무슨 능력 같은 게 있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 그 사람 속에 살아있는 게 분명했다. 폭풍을 진압하고 귀신을 축출하고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내고 가는 곳마다 저주 병에 들린 사람들은 온전케 하다는 소문이 이스라엘 전역에 파다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 오천명을 먹일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민족의 왕으로 삼고자 하셨다(요한복음 6:15).
기다렸던 모세 같은 선지자가 드디어 나타난 것으로 보았다(요한복음 6:31).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의 신이신 여호와가 세상에 있는 모든 신들을 다스린다고 보았다. 여호와는 만군의 주이시다. 여호와와 견줄 만한 그 어떤 신도 하늘과 땅에서 없다고 했다(시편 89:6-7).
특히 신명기 32:8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을 기업으로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할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이 말은,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과 나라를 다스릴 신분에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만큼은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고 다른 민족들은 이스라엘 민이 통치하는 체제가 하나님의 축복임을 굳게 믿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이 현실과 하나님의 예언 간의 그 차이를 극복할 메시야를 손꼽아 고대한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동일했다.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로 부름 받자 그들은 장차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게 되는가를 놓고 수시로 토론했다. 심지어 어떤 제자의 어머니는 두 아들을 데리고 와서 주의 나라에서 자기 아들이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졸라댄다(마태복음 20:20-21).
그들은 예수님이 기적이 우선적으로 이스라엘 적들에 대한 공격으로 보았다. 악마는 우선 하나님의 원수이다. 이스라엘이 왕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따라서 악마는 이스라엘의 원수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악령 추방은 곧 이스라엘의 회복의 기운 같은 것이었다.
자기들 이스라엘의 메시야가 어두움의 세력인 악마와 싸워 이기는 날 자기들은 정치적으로 해방되는 날로 간주했다(사도행전 1:6).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많은 사람들이 자진해서 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면서 호산나 소리쳤다(마가복음 11:10).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언젠가 베드로가 올바른 신앙고백 해서 주님께 호응을 받았다.
곧 이어 예수님께서 자신이 고난 받아야 된다는 말을 할 때에 그가 나서서 하는 말이 예수님을 결코 죽으실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마태복음 16:22). 그런데 예수님은 반대로 그런 베드로를 보고 사탄아 뒤로 물러가라고 하셨다.
바로 예수님이 보는 악마의 개념과 그 당시 예수님에게 관심을 가졌던 민중들의 악마의 개념이 달랐다. 그들은 철저히 자기가 속해 있는 민족이나 국가 중심으로 사고했다.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자기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 편이었다.
사람들은, 악이라는 것을 자기와 자기 영역을 공격하는 실체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악이란 예수님과 그의 나라를 공격하는 실체이다. 종교 조직체와 제도가 하나님의 나라를 대신하여 등장하게 되면 그들은 줄기차고 끈질기게 자기들이 세운 조직체를 고수하려 할 것이고 거기에 기준 해서 새로운 악마와 메시야의 기준이 설정된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악마로 몰리게 되고 대신 악마는 메시야로 대접받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이 차이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거꾸로 된 인식 체제를 가지고 있기에 도리어 예수님을 반대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요한복음 18:36).
이 차이성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 시대에 있던 이 세상의 유대 나라도 물론 포함된다. 그들은 무척이나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호산나라는 찬양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라는 분노로 바뀌었다.
무리들은 처음부터 변덕쟁이가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일관성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러나 예수님과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이 생각하는 나라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니라 성령의 나라였다. 바로 이러한 차이성이 십자가 사건의 동기이다.
예수님의 모든 활동과 말씀과 사역을 순전히 자기 나라의 영원성, 곧 자아의 영원성과 결부시킬 때, 이것이 사탄의 생각이요 동시에 사람의 일이다. 범죄 이 후 인간에게 있어 죄란, 이유 없이 자기 자신 만은 항상 존재해야 한다는 생존의지에서부터 터져 나온다.
어떤 경우를 당해도 나만큼은 절대적으로 살아있어야만 한다는 그 맹목적 영존성이 사람의 근본 악함이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태복음 16:23).
예수님은 이 땅에 불을 질러 버리기 위해 오셨다(누가복음 12:49).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다(마태복음 10:34). 그리고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면서 "오직 악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하라 하셨다. 예수님의 나라에서 볼 때, 악에서 구출되는 나라가 하늘 나라이다.
그 하늘나라가 이 세상 나라 반대편에 포진해 있으면서 이 세상 나라를 공격한다. 예수님의 이러한 급진적인 사고가 십자가 사건을 유발시켰다. 그렇다면 요즘도 이런 십자가를 믿고 따르는 자가 있다면 예수님과 동일한 사고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십자가 사건은 이처럼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있고 낯선 개념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인간 자체에서 나온 공의와 사랑 개념과는 판이했다. 항상 예수님의 아버지는 세상에서 봐서 항상 숨어 계신 분이다.
그 숨어있는 하나님이 나타난다고 나타난 하나님 되는 게 아니다. 숨어 계신 채로 나타나기 때문에 오히려 그 숨어 계심이 더욱 더 확대될 뿐이다. 숨어 계신 하나님이 육체로 이 땅에 오셨지만 여전히 숨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요한복음 12:36/이사야 45:15).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숨어 있었고 또한 예수님마저 사람들로부터 이해될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두움이 빛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미 어두움에서 벗어난 그 이후에나 벌어질 일이다. 어두움은 빛이 접근하면 거리를 두는 게 속성이다(요한복음 3:20).
예수님은 계속 자신이 죽음을 거론하시면서 죽은 사람으로 사람들을 접근하기 때문에(요한복음 10:15) 사람들은 예수님을 기피하게 된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도대체 죽음에서 더 이상 무엇을 더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같은 세상에 마음 두고 살면서 서로들 산 사람처럼 여기지는 주위 인간들로부터 지혜와 진리와 행복을 얻는 것이 우주의 순리라고 여긴다.
개인이 이루지 못하면 사회의 힘에 기대를 걸어보고, 사회가 자기의 소원을 이루어주지 못하면 다시 개인주의로 돌아서면 그만인 것이다. 국가든 사회든 나를 살려주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법이다. 개인에게 있어 죽음이란 의미 종결을 뜻한다. 죽음 뒤에 무엇이 있든 지간에 중요한 것은 '안 죽는 내가 된다는 것' 이 자체가 더욱 더 중요한 것이다.
자아가 죽고 난 다음에 아무리 멋지고 좋은 게 있다 할지라도 자아가 거기에 참여되지 못하고 그것을 소유화하지 못한다면 자기에게 무슨 가치와 의미가 있겠는가. 모든 실용성과 가치가 자아의 살아있음을 최우선 전제로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 세상 사람들의 본심이다. 남 좋아라 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특히 자기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남들에게 좋은 게 돌아 갈 수 있다는 희생정신은 다 무모하고 부질없는 선행에 지나지 않는다. 자아의 죽음 그 자체가 모든 것을 헛되고 허무하게 처리한다. 그래서 십자가 죽음 뒤에 있는 영생과 천국이라는 것도 자아의 영속성이 보장된다는 조건 하에서 받아 드리려고 하는 것이다. 적어도 최소한 영혼 불멸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담보라도 확실하게 제공되어야 복음을 받아드리겠다는 태도를 갖고 있다.
이런 자들에게 해 줄 말은 하나뿐이다. "인간은 애초부터 천국에 들어 갈 자격이 없는 존재입니다".복음이 영혼 불멸이나, 자아 불멸 논리와 뒤섞일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이것은 복음과 십자가의 도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발상이다. 세상 사람이 볼 때에 복음이 십자가 뒤 편에서 들려오는 소리이다.
그래서 십자가 정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복음을 이해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도는 전해져야 되는데 그 이유는, 십자가는 멸망당하는 자가 왜 멸망당해야 마땅한지 그 증거로서 작용하기 때문이다(빌립보서 1:28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전도란, 사람을 건지기 위해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게 아니라 멸망당할 자인지 구원받을 자인지 가려내기 위한 증거를 세상 바닥에 까는 작업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십자가가 구원의 증거가 될 것이요 어떤 사람에게는 멸망의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런데 예수 밖에 있는 자들에게도 똑같은 활용이 가능하다. 십자가를 믿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과 같이 멸망의 구렁텅이로 보인다. 정말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을 믿고 있기에 스스로 죽음으로 채찍질하는 것이 소위 예수 믿는 사람들이다.
십자가 자체가 그들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증거가 된다. 거기에 비해서 자신들은, 예수 전도자의 달콤한 꾐과 공갈을 용케도 벗어날 수 있었던 다행스러운 자들이다.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말도 안 되는 허튼 발언을 온전한 정신 상태로서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대견스럽게 까지 하다.
예수의 피가 자신의 죄를 씻어 준다는 고대의 주술 종교의 재탕을 제정신으로 거뜬히 버텨 낸 것이다. 이 세상에 있는 종교란, 결국 도덕의 회복과 향상을 위해 필요하기는 필요하다.
종교란, 미래를 직면하면서 미래 사회가 필요로 하는 믿음과 전반적인 신뢰성을 갖도록 만드는 것이며 동시에 현 사회 전반적인 도덕적 저하와 싸우는 것이다. 뭔가 이성적 질서가 갖추어져야 살만한 세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각에 취하듯이 거기에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
비이성적으로 도취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종교라는 것도 결국 인간들의 심성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인간에게 한계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 이유는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결국 죽어서 자연으로 환원된다고 하면 죽음이라는 것을 그토록 무서워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 마음먹기 나름이며 뚜렷한 자기 주관만 확립된다면 소신껏 보람있는 생을 보낼 수 있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구태여 종교 속으로 자기를 상실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러니 모든 종교의 중심은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삶과 존재의 영속성에 있다고 예수 밖에 있는 자들은 생각하고 있다.
예수님의 죽음을 사이에 두고 신과 자연과 진리와 인간과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들의 지속성과 영원성을 테마로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려고 한다. 죽음을 사고의 토대로 잡는 것은 곧 죽음에 대해서 연정을 품는 것으로서 이것은 비정서적이고 건전치 못한 암울한 정신 구조를 보여주는 것이란다.
살아 있음에 대한 찬미와 감탄과 생의 연결 고리에 대하여 열정을 보이는 것이 보다 건전하고 안정된 정신 풍토에 해당된다고 한다. 이런 자들에게 있어 멸망이라는 개념은, 죽은 예수님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자기의 죄를 생각하면서 절망하는 그런 자들에게 해당되는 인상이다.
그러나 예수 밖에 있는 이런 자들은, 자아와 자기 세계에 대한 집착하는 것이 모든 정신세계에 혼란과 모순을 야기시킨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자기를 버리고 딴 것으로 바뀌어져야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자기만의 움집 속에 자아를 틀어박아서 꼼짝달싹 움직이려 하질 않는다.
전도란, 예수 밖에 있는 존재에 대해서 예수 밖에 있다고 말해주는 일이다. 다. '예수 안'과 '자기 안',이 상반된 입장은 사실은 관계 맺음으로 생성된 결과이다. '자기 안'의 관계는 옛 아담과의 관계로 이루어지고, '예수 안'이란 예수님과의 관계로 이루어졌다(로마서 5:11-21).
아담 계통 모두가 단순한 존재의 영속성이 아니라 죄 있음의 영속성이다. 사망이 오고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죽어지는 것을 봐서 확실하다. 같이 사망을 맞이하는 자들끼리 아무리 모여서 회합을 갖고 아이디어를 끄집어 내봤자 나오는 것은 죄밖에 없다. 그리고 계속 죽음을 치닫는다.
모든 인류가 아담 안에 있다는 말은, 모두가 아담이라는 한 사람 안에 갇혀 있다고 볼 수 있다.아무리 몸부림쳐도 아담 그 사람의 개인적 운명 안에 서 맴돈다. 세대와 세대간의 사슬이 아무리 영원토록 이어진다 해도 그것은 아담을 길게 늘어뜨린 것밖에 안 된다.
그 안에서 상호간의 관계란 사실은 한 덩어리가 되어 똑같은 평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아담의 후손으로서 아담의 슬픈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는 이 고정된 운명이 '아담 안에서'라는 표현으로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아담 안에서'의 고정성은 그들 나름대로의 세계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담 밖의 세계에 대해서 그들은 완벽하게 무지하다. 이들이 생각하는 모든 목표와 대상은 오직 인간 세상뿐이다.
인간 말고 또 다른 존재를 위해서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아담 안에서 논의되는 것 중 신이라든지, 하늘의 세계라든지, 신비롭고 거룩한 영역이라는 것도 모두 아담 안에 있는 그들 자체의 확장을 위한 초월의 몸부림이기 때문에 이러한 노고와 수고의 결과라는 것이 기껏 해봤자 아담 안에 있는 천장만을 때릴 뿐이다.
예수 안에의 세계는 이런 아담 안의 세계를 사망으로 간주하고 공격한다. 그러면서도 새로이 세워지는 예수 안의 세계의 고리는, 아담 안의 세계의 고리와 같다. 이점에 대해서 성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로마서 5:14).
오실 자, 즉 예수님을 목표로 해서 아담은 이 땅에 태어났다.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죄가 그 개인에게 왕이 되고 더 나아가서 그의 후손에 대해서도 왕이 되었던 원칙이, 이제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한 사람의 의로 말미암아 그 분 개인에게도 생명이 충만할 뿐더러 이제는 '예수 안'이라는 세계 안에 있는 모두에게 영생이 지배한다.
아담과 그 후손 사이의 관계성은, 오실 자의 관계성의 표상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은혜가 다른 이들까지 전달될 근거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러면 '예수 안'의 세계는 어떻게 생겨나는가?
'아담 안에서'가 시작될 때, 하나님께서 아담과 특별한 관계를 가졌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안에서'가 시작되려면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가 수립되어야 한다. 창세기 3:15에서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의 입지가 뱀의 후손의 머리를 치는 특별한 사명과 더불어 아담 안에서 시작됨을 분명히 밝히셨다.
예수 안의 세계는 바로 아담 안에서 이루어진다. 아담이 지니고 있는 사망의 왕노릇에서 벗어나는 분이 바로 '오실 자'이다. 사망의 권세를 무너뜨린 분은 예수님이시다. 그런데 아담 안에서의 죄의 확산은, 육체성이 지닌 유전의 법칙에 따라 대대로 전염되어 그런 게 아니라 죄 자체의 세력 때문이다.
아담의 범죄를 기화로 하여 죄는 아담의 안에서 활약했고 그리고 그 지배력은 인간의 그 어떤 노력으로도 방비할 수 없었다. 인간이 죄를 싫어한다고 해서 죄의 통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 선택권이 예수님에게 있다.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가 제공되게 하는 것은 은혜가 왕노릇하기 위해서이다. 예수 안으로 구원받은 자가 더 이상 자기 육체를 자랑하지 못하게 한다(고린도전서 1:29; 에베소서 2:9).
죄의 지배를 받을 당시, 어쩔 수 없이 죄지을 수밖에 없던 인간들의 세계가 바로 아담 안의 세계라면 이제 예수 안의 세계에 놓인 사람은 은혜를 거부하려야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만약 은혜를 거부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은혜의 왕노릇'의 위상이 거짓임이 드러난다. 따라서 전도란, 이 은혜의 사역의 일부로서만 나와야 한다. 즉 전도해서 은혜를 받는 게 아니라 전도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은혜이다 는 말이다.
이처럼 전도란, 서로 독자적인 다른 세계에 소속되어 있음을 소개하는 것이다. 그 구별성과 차이성을 분명히 하는 것이 전도이다. 아담 안에 속한 사람들도 나름대로 열심히 전도한다. 고도로 발달한 문명의 혜택성과 문화의 정숙함과 도덕성을 재료로 삼아 화려한 미래를 보장한다고 인류를 독려하고 극찬해 마지않는다. 더 이상 천국이 불필요한 세계를 건설하자고 전도한다.
그런데 이들의 전도는 외부 인물의 은혜성에 기초한 게 아니라 사실상 설득이요 체계적인 교육이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세계의 전도는 세뇌 교육을 하는 게 아니라 하늘의 은혜성을 그냥 소개하는 선에게 그친다. 마치 목격자가 자기가 본 것은 법정에서 증언하듯이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참된 전도와 거짓된 전도와 차이가 난다. 아담 안에 있는 자는, 그 동안 인류가 달성한 모든 성과가 다 힘들게 애쓰고 노력한 댓가로 얻어진 것이다. 따라서 아담 안에서 계속 태어나는 신세대들이 계속 아담 안에 남아서 선조들의 노력을 연이은 맡아 문화 창달에 나서게 하자면 끊임없는 교육이 요구된다.
보다 체계적이고 집단적이고 보편적 사고를 수립할 수 있도록 한다. 이것이 조직이 해야 할 사명이다. 조직 내의 모든 교육은 조직 그 자체의 발전을 목표로 한다. 발전이란 항상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 능률성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 여분의 힘이 조직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조직 그 자체의 경제성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희생자들이 있어야 한다. 조직원들의 희생을 기초로 해서 조직은 여분의 힘을 축적할 수 있다. 자기 조직원으로 하여금 기꺼이 희생자의 대열에 나설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교육이다.
이 교육의 목표가 하나로 고정됨으로 말미암아, 자아를 섬기는 인간들의 근원적인 본능을 거세해 버린다. 개인이나 조직이냐 양대 편에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흡수 통합시켜 버리고 오직 하나만 남긴다. 이 하나 밖에 남지 않는 유일무이한 생에 목표로 갖게 하는 데는 그만큼 심리적인 부축임이 필요하다.
그 부축임이 바로 제2의 자아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즉 조직 자체를 조직원 개개인의 제2의 자아로 만들어 주겠다는 것이다. 개인이 힘이 부족해서 못다 이루는 일을 조직이라는 이름으로 자아실현의 욕구를 맛볼 수 있게 한다. 이 확정된 목표가 정해지면 그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모든 과정은 선이 되고 진리가 된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런가 하는 것은 모두 다 목표점에 보다 정확하게, 적은 투자로, 빠른 시간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모든 조직원들은 혼신의 힘을 하여 그 목표에 정조준 해야 하며 최단거리를 찾아야 한다.
그 방법은, [계획-시행-점검-적용-재계획] 이라는 끝없는 순환 고리를 내용으로 하는 사내 교육이다. 이 교육에 조직은 사활을 건다. 나날이 커 가는 조직은 사람들의 희생이 모아져서 성립되었기 때문에 늘 사람들이 꿈이요 이상이다. 그리고 선전하는 모체가 된다.
조직은 힘을 상징이다. 힘이 뭉치가 조직이다. 그리고 그 힘을 숭상하려고 그 조직에게 경배한다. 힘있는 조직은 더욱 더 경배를 받게 된다. 힘이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힘에서 나온다. 아담의 세계에서 인간 위에 존재하는 힘은 악마의 힘이다(마태복음 4:9).
악마에게 경배하면 그는 힘을 누릴 수 있다. 죄의 왕노릇은 결국 실질적으로 악마의 왕노릇이다. 악마는 실질적으로 아담의 세계를 관장한다. 악마의 힘은 조직의 힘으로 등장하고 그 조직은 힘의 집결체로서 인간에게 경배의 대상이 된다. 인간은 주제넘게도 아담 안에서 영원하기를 소원한다.
존재의 단절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경배 받는 힘의 조직은, 주로 역사가 오래된 조직체들이며 또 앞으로 오래 버텨 나갈 수 있어 보이는 단체이다.
힘이란, 우주 속에서 안정성을 의미한다. 혼란과 변동과 우연 속에서도 질서케 하는 것이 힘이다.
안정성이란, 궁극적으로 우주 구석구석을 모두 정복하고 채워버려서 더 이상과 불안전한 요소가 남아있지 않는 상태 되기를 지향하면서 거론되는 속성이다. 온 땅을 차지하고 정복하고 다스리고 충만 하는 것 그 가운데서 인간들은 비로소 영원한 안정된 존재가 된다고 믿고들 있다.
그래서 이미 악마가 다스리고 지배하는 현 세상에서는, 이 힘의 기득권자와 협조를 잘하는 것이 안정성에 보다 가까이 가는 삶의 방식이다. 기존의 힘 소유자들은 역사를 자랑한다. 그리고 전통을 고수한다. 전통과 역사를 깨트리려는 행위는 곧 실권자가 만든 질서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아담 안의 세계는 바로 자신들의 세계의 안정성을 널리 전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도에 대해서 예수 안의 세계는 기존의 힘의 원천을 부수는 것으로 전도를 실시한다.
마태복음 12:28-30에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니라"라고 되어 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전도를 마치 남의 집을 늑탈하는 강도에 비유하고 있다. 힘에 싸움에서 밀리는 않기에 너희들이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귀신의 왕 바알세불 보다 더 큰 이로서 자기를 소개하고 계시다. 예수님의 당시의 힘의 소지자는 종교 조직체의 상층부에 해당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악마가 자리잡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 당시에 예수님이 모습은 그냥 고난받는 인자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배후에는 성령님이 계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 하시기를 "누구든지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하셨다(마태복음 12:32).
즉 아담의 세계에서는, 악마가 종교 조직체를 앞장세우면서 힘을 전도하고 있고 예수님의 세계는,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앞장세우시면서, 기존의 힘의 붕괴를 발표하면서 은혜를 전도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구약 성경을 완성하려 오신 예수님은, 기존의 구약 성경을 바탕으로 구축되었다고 자부하는 유대교라는 조직체와 대결 구조를 가졌었다.
그들이 정말 성경의 참 뜻을 알았더면 예수님을 영접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이 아들인 예수님을 적대시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과 다르게 사셨기 때문이 아니라(요한복음 18:22-23) 그들이 만든 제도 그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는데 있었다.
요한계시록은 유대교를 사단의 모임이라고 묘사하고 있다(3:9). 성경을 세속화시키면 곧 유대교처럼 된다. 말씀의 세속화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조직체의 가르침으로 전환시킴으로 말미암아 시작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로서 메시야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종교 조직체가 자리 잡도록 집어넣는 것이다.
생명은 예수님이지 종교 조직체가 아니다. 예수님만 알면 얼마든지 전도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종교 조직체를 필요로 하는 심보는 어디서 온 것인가?
예수님은, "나는 전통이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나는 진리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기존의 전통 질서에 대한 대 파국을 선포하시는 것과 동시에 전통에 의미를 주는 기존의 모든 조직체와 대결하겠다는 자세이다.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을 전하려 왔지, 예수님을 설교하는 설교자 그 당사자를 전하려 오신 게 아니다. 그리고 그 설교자를 양성하는 신학교나 소속되어 있는 단체를 전하려 오신 게 아니다. 여기서 예수님에 대한 극렬한 반발이 유대교 측에서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구원의 진리가 자기 체계를 빗겨 지나갔기 때문이다. 전통을 고수하는 종교 조직체는, 하나님의 진리를 전통으로 가공하고 말았다. 예수님만 자체만을 전해야 되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에 복음의 현재성 보여야 한다. 만약 교회가 자기의 역사와 전통을 과시한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왜냐하면 자기 할 일을 못 찾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현재성은 교회의 현재성으로 증명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교회는 쉴새없이 복음에 의해서 과연 교회인가 아닌가 점검 받아야 한다. 그래서 항상 역사와 전통은 무시당해야만 한다. 참으로 복음을 전하는 교회 같으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한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교회가 되어, 교회는 죽고 십자가만 보이는 모습으로 등장될 것이다.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방법밖에 없다. 그리고 복음이 구성한 새 교회로 재등장되어야 한다. 늘 허물어지기를 원하고 늘 세워지기를 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교회 스스로 힘으로 지탱하지 않는 교회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전도이다.
전도란, 교회 자신의 붕괴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 속한 모든 것이 현재 하늘의 저주의 대상이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서 세우심을 받았지만 역시 허물어지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전도이다. 이스라엘 국가를 통해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본 뜻, 그것은 땅의 죄악성이며 아담 세계의 정죄성이다.
이방인들이 과거 유대인들과 상관없이 예수님과 막무가내로 연결될 수는 없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 자체가 아브라함 후손의 운명과 자기와 동일시해야 한다. 이방인이 새삼스럽게 유대인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죄악됨을 보이기 위해 뽑힌 그 유대인의 슬픈 역사가 바로 예수 믿는 이방인의 역사를 대신했다는 말이다. 이방인이건 유대인이건 다같이 구약역사에 나타난 실패한 유대인들이다.
그리고 그 노선 위에서 하나같이 죄인들이다. 이럴 때 비로소 구세주가 유대인에게서 나오게 되며(요한복음 4:22) 그 구세주로서의 예수님의 존재가 이방인건 유대인이건 다같이 의미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것은 또한 허물기 위해서 세우신 것이다(요한계시록 2장-3장). 영원하다는 생명책, 그러나 그 생명책의 이름도 지움을 받는다(시편 69:28). 모든 것이 붕괴되고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이런 종말의 시점에서, 지상에서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을 찾는 자만이 구원을 얻는다(로마서 10:13; 사도행전 2:21).
그러나 이 복음을 믿을 사람은 없다(로마서 10:16). 복음을 듣지 않아서 안 믿은 게 아니다(로마서 10:18). 그것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이 되게 어떤 이는 완악한 채로 남겨 두었다(로마서 11:7). 그리고 어떤 이는 은혜로 택하심을 입어 구원의 남은 자가 된다(로마서 11:5).
어쨌던 자연적으로 복음을 믿어 구원받는 자가 없이 모두 다 순종치 아니한 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 만이 그들에게 임하여 그들이 구원되기 때문이다(로마서 11:31-32).
결국 전도란, 사람을 기어이 구원하는데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이란 자생적으로 절대로 복음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민족 중심으로 전도를 하는 것이다. 이방인들에게 전도를 하는 것도 사실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기 나게 하기 위해서이다(로마서 10:19).
전도의 대상이 이스라엘인 중심이 되는 것은 그들의 선택-범죄-회복이라는 과정을 가지고 그들 위에 하나님의 구원의 심중을 담고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 돌아간다는 이 사실 자체를 전도의 내용으로 삼기 위해서이다(로마서 11:36).
세상이 심판 받는 것도 이스라엘이 범죄 했기 때문이요 이방인들이 덩달아 구원받는 것도 이스라엘의 회개를 염두에 두고 내려주신 은혜이다. 결국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 받은 자에게 긍휼을 자의로 주시는 것이 변함없는 하나님의 소신이다(출애굽기 33:19).
이러한 참된 하나님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 소개하는 것이 전도라면, 긍휼과 일방적 은혜성에 저촉되는 내용을 전하는 것은 거짓 하나님을 전하게 된다, 즉 전도 훼방이다.
예수님이나 사도나 선지자들이 복음을 전했을 때, 다음과 같은 구약 인용이 반드시 성취되는 쪽으로 전하셨다.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사도행전 28:26-27/마태복음 13:14-15/이사야 6:10).
이 말씀은 구약 이사야 시절 때, 이스라엘이 패망하는 종말을 기준으로 해서 나온 전도 방식이다. 이 전도 방식이 성취되려면 역시 전 우주의 종말 때에나 가능하다. 이런 식의 전도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 자체가 종말이다. 완악한 인간들에 대해 정말 너희들은 이런 정도로 완악한 존재이니라 라고 전도하는 것은 대 심판의 당위성을 받쳐주는 토대가 된다.
완악한 인간들이 이런 전도를 들었다고 해서 회개하지를 않는다. 단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현 평판을 전해들을 뿐이다. 종말 시의 전도 방식은 또 다시 기회를 부여하는 전도가 아니라 이미 모든 기회는 상실되고 다만 완악해 자에게 주어질 심판만을 대기하라는 일방적 통고에 해당된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통보는, 이 이스라엘의 운명과 파멸적인 역사를 바라보면서 이것은 자기 파멸로 받아드리는 이방인들이 있을 수 있다(사도행전 17:31). 바로 이방인 중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심판 선언을 곧이곧대로 믿는 자가 생겼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성을 새삼스럽게 이스라엘에게 보이기 위함이다.
은혜성이란, 반드시 다른 한쪽의 파멸성과 대조되면서 등장된다. 이스라엘의 멸망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성을 부각하는 재료가 된다. 전도란, 먼저 선택된 이스라엘 망했다는 것이 내용으로 들어간다. 심지어 그 이스라엘인들이 구원자로 오신 분을 도리어 죽음으로 처치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방인들은 그것을 듣고 그 사실을 자기에게 적용시켜 본다. 이스라엘이 망했고 또 예수님을 죽였던 그 동기는 바로 예수 믿는 이방인 자신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상황에서 항상 일어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구약 성경이 이로써 필요하다.
이스라엘 인들의 오류는 항상 교회 내에서 재현된다. 바로 이런 점에서 교회는 날마다 종말이 일어나야 한다. 복음적 전도란, 종말 하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종말적 사건을 담게 되면 복음에는 반드시 걸림돌이 들어가게 된다.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나니 저는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로마서 9:33; 베드로전서 2:8; 요한복음 6:61; 마태복음 15:12; 이사야 8:14-15).걸림돌 작용을 하지 못하는 전도는 잘못된 복음을 전했을 경우뿐이다.
복음이 걸림돌이 된다는 것은, 그 중심에 세상 사고부터 배척받은 분이 자리잡고 있음을 암시한다. 시편 118편 22절에 다음과 말이 나온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버린 자는 누구며 버림받은 분은 누구인가? 구약 후반부를 장식하는 '남은 자' 개념은 항상 기존의 체제로부터 선지자와 동조해서 함께 버림받은 운명을 지닌 자들이다.
이 버려진 모퉁이 돌로부터 전도가 시작된다는 것은, 이 세상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부합되는 내용은 복음 안에는 일체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주님과 함께 버려질 사람을 찾아나서는 작업이다.
그래야 이들 남은 자만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모퉁이 돌을 가진 성전이 구축된다(에베소서 2:20). 여기만이 유일하게 신성한 성전이다. 구약에서의 신성한 장소는 성전이었다. 그러나 지성소마저 파괴되고 남은 것은 사람에게 버림받은 모퉁이 돌 뿐이었다. 여기서 전도의 본질이 드러난다.
전도란, 예수님을 버린 범인을 찾아나서는 작업이고 또한 예수님과 같이 고난 중에 있는 자를 발굴하는 작업이다. 모퉁이 돌로 시작되는 성전이 생긴 것은, 이 세상에 더 이상의 거룩과 신성함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처럼 계속해서 인위적인 거룩 체제를 고수한 자가 있다면 이들이 바로 예수님을 버린 장본인들이다.
성령께서는, 이들 종교집단이 하는 나름대로의 전도와 경쟁관계에 들어간다. 다같이 전도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한 쪽은 교세확장이라는 차원이고 다른 쪽은 교세확장을 탐욕이라고 정죄하면서 오직 모퉁이 돌만 소개한다. 어느 쪽이 인간의 원초적 인간의 탐욕을 고발하고 있는가?
진정한 전도란, 세상이 얼마나 교만하며 예수님의 사고방식을 싫어하고 또 버리고 싶어하는 가를 확인하는 절차이다.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전도에 나섰지만 그 결론은 세상이 소돔과 고모라 보다 더 악하다는 것을 다시금 인식 한데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장래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성이 이 세상보다 훨씬 덜 심판을 받았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악하다는 의미는 사회적 범죄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계시를 거부하는 교만의 죄를 뜻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신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25-27).
아들의 소원이 없으면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예수님은 전했던 것이다. 그러니 구원받은 자가 되었다는 것이 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을 받은 것인가! 예수님의 소원대로 구원받은 자는 예수님 이외의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얼마든지 포기할 마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예수님 믿는데 보탬이 되지를 못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마지막 부분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사도행전 28:25-27).
사도 바울이 왜 이사야의 본문을 인용하는가? 그것은 종말이기 때문이다. 종말에는 필히 구약 예언자들의 예언이 꼭 성취되어야 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이 사람 포섭을 목표로 하는 전도를 감행함을 나열시키는 책이 아니다. 이 시대가 바로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 종말임을 선전하고 증언하는 책이다.
이것이 참 전도의 취지이다. 구약 선지자나 예수님이나(요한복음 12:37-43) 사도 바울이나 같은 취지에서 전도하셨다. 죄악을 죄악으로 드러내어야 하나님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차원이 되기 때문이다. 종말을 예상한 구약의 예언이 신약에서 탈락되어서는 안 된다. 방치되어도 안 된다.
그렇다면 약속이 실현이 안 된다. 따라서 전도란, 약속의 예언을 되살리는 작업이다. 세상에 멸망이 왔음을 알리는 것이다. 이 멸망의 말씀을 마땅히 들어야 되는 자들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포함된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말해서 스스로 그들 모두에게 빚져 있다고 한 것이다(롬1:14).
그들을 몽땅 구원하지 못해서 빚진 자가 아니라 그들에게 말씀의 기적적 성취성을 남김없이 다 전달하지 못할까봐 빚졌다는 것이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여!"(롬 10:15). 왜 아름다운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멋진 놀라운 소식이 되는 것이다.
악마는 악마대로 실체를 드러나고 긍휼을 입은 택한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 확연히 드러나게 하는 것이 말씀의 위력이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모든 인류를 다 구원할 수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게 아니다. 구원 받지 못할 자를 철저히 배척케 하는 능력의 복음이니 정말 그 성취성이 아름다운 것이다.
사도 바울은 늘 마귀가 싸우고 있다(엡 6:10-13).그 마귀의 정체는 무엇인가?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유감없이 폭로된 바 있다.
마태복음 4:1-11과 누가복음 4:1-13에서 사탄은, 나름대로 가짜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그런 메시야 상을 이스라엘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다. 경제적인 지도자로서의 메시야, 그리고 정치적인 지도자로서의 메시야, 종교적 지도자로서의 메시야 모습을 예수님 앞에 던져 본다.
경제적 지도자 상은, 백성들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사명으로 오시는 메시야이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응수했다. 살리는 것은 말씀뿐이다. 원래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사용한 그 위력의 말씀만이 죄로 죽은 인간을 새롭게 창조할 수가 있다. 거기에 비해 사탄은 기존의 세상에서 고통만을 계속 제거해 나가는 메시야이기를 기대한다.
정치적 지도자 상으로서 사탄은 권세와 영광을 제시했다. 이 지상에서 권력과 거기에 맞는 영광스러움이 모든 정치의 목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주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그분만 섬기는 것이 참된 나라라고 하셨다.
셋째로, 사탄은 성전에서 기적을 행하는 종교적 지도자 상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면모를 보이라고 한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이란 인간들의 시험의 대상이나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이스라엘은 인간들의 선택 여하에 의해 굳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뽑혀 나오기 때문이다.
바로 이 세 가지의 적대 사상을 염두에 두면서 사도 바울은 전도해 나갔다.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은 형적은 지나감이라"고 당부한다(고전 7:31).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도 그리스도 안에 감추었음이니라"고도 했다(골 3:2-3).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 미련하게 보임이요"(고린도전서 2:14/고린도후서 4:3-4).
사탄은 위기 의식을 가지고 있다. 초조하다.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이 초조감은 감추지 않는다.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태복음 8:29).
도대체 사탄이 무얼 무서워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나의 하나님,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 27:46). 이것은 그 동안 악마 체제 하의 인간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 평가이다. 이 평가를 무서워한다.
바로 이점을 전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체험을 했다. 다메섹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비명 질렀다. "주여 뉘시니이까?"(행 9:5). 그는 무서움에 떨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그 무서움 안에서 다시 발견했다. 종말 때의 복음 전도자는 다 이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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