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그분은 사랑으로 인해 자신의 진노를 가라앉히기로 결정하셨으므로 우리는 그분에 의해 의롭다하심을 받고, 그분을 위해 구속되었으며, 그분과 화목 되었다. 그리고 이 화목에는 ‘접근’과 ‘가까움’이라는 개념이 포함된다. 그것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역동적으로 아는 것, 또한 ‘영생’(요 17:3)의 일면이다. 예전의 고통스럽던 소원함 대신 생겨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그것은 담대함이라는 특징을 띠고 있다. 사도들이 그 말을 나타낼 때 즐겨 쓴 단어는 ‘팔흐레시아’(parrhsiva)로서, 이는 세상을 향해 우리가 증거할 때 그리고 하나님께 우리가 기도할 때 ‘말의 거리낌 없음, 솔직함, 명백함’을 뜻한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이제 '담대함(parrhsiva)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담대함을 갖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는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의롭다 하심을 얻고 화목되었은즉 마지막 날에는 ‘더욱’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 또한 아무것도 우리를 그분의 사람에서 끊을 수 없음을 확신한다.
새로운 관계가 갖고 있는 두 번째 특징은 사랑이다. 실로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우리가 전에 그분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이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았다. 사랑은 사랑을 낳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어떤 의미에서 우리를 해방시킨 그 사랑은 또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를 에워싼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우리에게는 남은 삶을 찬양과 감사로 섬기면서 그분을 위해 사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기쁨은 십자가에 의해 구속받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세 번째 표지이다. 바벨론 포로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의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그들의 ‘혀에는 찬양이 찼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그렇다면 훨씬 더 압제적인 노예 상태에서 구속을 얻은 우리는 얼마나 더 기뻐해야 하겠는가?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감정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함께 음식을 나누었다.
우리가 주일에 함께 지내는 짧은 시간은 우리의 나머지 삶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예리한 초점을 맞추려는 것이다. 겸손하게(죄인으로) 그리고 담대하게(용서받은 죄인으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사랑의 응답으로 하나님의 주도적 사랑에 반응하고, 악기를 치면서 그분을 예배할 뿐만 아니라, 찬양으로 우리의 기쁨을 분명히 표현하면서 그분의 임재로 빠져들어 간다.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일 때 무엇도 그들의 찬양을 멈추게 할 수 없다. 기독교 공동체는 경축하는 공동체이다.
바울은 가장 잘 알려진 유대인의 절기를 언급함으로 우리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바 기쁨에 찬 유쾌한 감정을 표현한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고전 5:7). 비록 그 뒤 일주일간 계속되는 누룩없는 빵의 절기도 유월절이라고 부르게 되긴 했지만, 엄밀히 말해서 ‘유월절’은, 니산월 십오 일 저녁 곧 그날 오후 유월절 양을 죽인 직후(니산월 십사 일)에 먹었던 공동 식사를 말한다. 사람들의 기쁨의 근거는, 그들이 큰 희생을 치르고 애굽에서 구속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희생이 바로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 자신을 드리신 것이었다. 우리의 유월절 양이신 그분이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그분이 귀중한 생명의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가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절기를 지키도록 권고받는 것이다.
사실, 기독교 공동체의 전체 생활은 우리가 사랑과 가쁨과 담대함을 가지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을 경축하는 하나의 축제로 생각되어야 한다. 이런 경축을 통해 우리는 하늘의 예배에 몰입하게 되며, ‘천사들과 천사장들과 하늘에 있는 모든 무리’와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또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분의 가치를 인저앟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의 성가대와 함께 창조주이며 구속주이신 그분의 존귀하심을 찬양하게 된다.
“우리 주 하나님이시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 4:11).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5:6)고 사도 바울은 묻는다. 바로 이 누룩에 대한 언급이 그에게 유월절과 무교절을 상기시킨다. 그리스도인들이 ‘명절을 지킬’ 때 그들은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없는 떡’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8절). 왜냐하면 기독교의 절기는 이교도의 절기, 곧 열광이 수반되고 종종 만취와 부도덕의 난장판으로 타락해 버리는 축제와는 철저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경축은 거룩한 특색을 띠어야 한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궁극적 목적은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골 1:22)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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