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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이정표/그리스도의 십자가

13-5. 믿음과 욥기

by JORC구원열차 2009. 11. 26.

13-5. 믿음과 욥기

 

다섯째,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합리적인 신앙의 기초이다. 육체적이고 정서적인 이 모든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극렬하게 시험한다. 재앙이 우리를 압도할 때 하나님을 계속해서 신뢰하는 것이 어떻게 합리적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좋은 대답은 욥기에 나와 있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소개 되고 있다. 하지만 하늘의 회의실에서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를 얼핏 보여 준 후에, 욥에게는 개인적인 비극적 사건들이 연달아 덮친다. 그는 가족들, 종들, 자녀들 그리고 건강을 잇달아 빼앗긴다. 그를 덮친 재앙의 규모를 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책의 너머지 부분에서 욥과 소위 그의 ‘안위자들’, 젊은 사람 엘리후, 마지막으로 하나님 자신 간에 전개된 대화 가운데 고난에 대해 가능한 모든 반응이 총망라되어 낱낱이 이야기 되고 있다.

 

욥 자신의 태도는 자기 연민과 자기주장이 혼합된 것이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아내의 충고를 따를 것을 거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가 난 날을 저주하기 시작하며 곤고함으로 죽을 날을 고대한다. 그는 세 친구들의 비난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대신 그 자신은 하나님을 대항하여 비난한다. 하나님은 그에게 너무나도 잔인하시며 심지어 무자비하시기까지 하다. 설상가상으로 하나님은 욥의 의를 완전히 부인하신다(욥 27:2). 욥은 자신의 결백함을 열렬히 주장했고 언젠가 그의 정당함이 입증되리라고 확신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욥의 친구들이 권한 태도는 자책(self-accusation)이라는 말로 가장 잘 묘사될 수 있을 것이다. 욥은 죄를 이었기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다. 그의 고난은 그가 행한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다. 이것은 그들이 싫증이 날 정도로 되풀이하는, 악한 자에 대한 통례적인 정설이다. “악인은 그 일평생에 고통을 당하며”라고 엘리바스가 말한다(욥 15:20). “악인의 빛은 꺼지고”라고 빌닷이 덧붙인다(욥 20:5). 한편 소발의 말은 “사곡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는 것이다(욥 22:5).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극하니라”(욥 22:5). 하지만 욥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의 친구들은 ‘쓸데없는 의원’(욥 13:4), 그리고 하나님은 후에 욥의 판결이 옳음을 확증하신다. 하나님은 그들의 ‘우매함’을 말씀하시고, 그들이 그분의 종 욥이 했던 것처럼 ‘정당한’ 말을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욥 42:7-8).

 

다음에 엘리후가 등장한다. 비록 그는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고 했기 때문에 노를 발했지만(욥 32:2),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말하는 데 자신이 없어한다. 엘리후가 말을 할 때 취하는 입장을 욥의 세 안위자들의 입장과 구분하는 일은 결코 쉬지 않다. 왜냐하면 때로는 그도 옛 정설을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엘리후가 권하는 태도를 자기 단련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왜냐하면 그의 독특한 강조점은 하나님이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에게 교만을 막으려’하시므로 고난을 포함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욥 33:14,17). 그러므로 하나님은 ‘교훈을 듣게’하도록, 사람을 만드셨고, ‘학대당할 즈음에 그 귀를 여신다’(욥 36:10,15). 실로 “누가 그같이 교훈을 베풀겠느냐?”(22절). 그분의 교훈은 심지어 일종의 ‘간청’[(wooing(16절)NIV참고]으로서, 그분은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탄원하여 그들을 그들이 처한 비탄으로부터 구하고자 애쓰신다.

 

마침내 욥과 그의 안위자들과 엘리후가 철저히 논쟁을 하고 났을 때,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다. 욥의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이제 권고되는 태도는 자기 포기라고 부를 수 있을 듯하다. 하나님은 욥의 세 친구가 비난한 것에 결코 동조하지 않으시고, 욥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 것에 대해 그를 책망하지도 않으신다(욥 40:8). 그분은 욥의 불평을 진지하게 들으시고 그에 따라 응답하신다. 그러나 욥은 ‘지식 없는 말’을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바로잡는’(욥 40:2, NIV참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분을 비난하고 책망하는 것이 결코 옳지 않기 때문이다.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고 하나님은 물으신다(욥 40:8). 그리고 욥은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이전에 그는 스스로 한하고 하나님을 경배한다. 그가 ‘본’ 것, 그로 하여금 자기주장에서 자기 포기로 변화시킨 것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은 그에게 질문을 퍼부으셨다. 땅과 바다가 만들어질 때 그는 어디에 있었는가? 그가 눈과 폭우와 별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가? 그가 사자와 산 염소, 들나귀와 들소, 타조와 말, 매와 독수리 등 동물세계를 감독하고 유지할 전문가적 지식을 갖고 있는가? 무엇보다도 욥은 하마와 악어의 힘의 신비를 이해하고 그것을 정복할 수 있는가?

 

욥에게 창조 세계의 지혜와 권능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온당한 것이었다면, 우리가 사랑과 정의를 십자가에서 계시하신 그 하나님을 믿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 것인가? 어떤 대상을 신뢰하는 것이 온당한지의 여부는 그것이 과연 믿을 만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지에 달려 있다. 그리고 십자가의 하나님보다 더 믿을만한 분은 아무도 없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지금이나 마지막 날에나 저의가 실패하거나 사랑이 좌절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확신시켜 준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 하시겠느뇨”(롬 8:32).

 

하나님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으신 것이 없으며, 또 어떤 것도 그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도록 하실 것이라고 확신시켜 주는 것은 바로 자기 아들을 주신 것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헌신이다(35-39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저의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하는 십자가와 그것들이 완전하게 드러날 심판 날 동안 그분을 믿는 것은 매우 온당하다.

 

십자가는 고난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고난을 바라보는 데 필수 불가결한 관점을 제공해 준다. 하나님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십자가)에서 그분의 거룩한 사랑과 사랑에 찬 정의를 보여 주셨기 때문에, 개인적인 것이건 세계적인 것이건 다른 어떤 역사적 사건도 그것을 압도하거나 논박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