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정표/그리스도의 십자가

결론-십자가의 편만한 영향력 / 결-1.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일곱 가지 주장

JORC구원열차 2009. 11. 26. 10:02

결론

십자가의 편만한 영향력

 

“왜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여 우리는 비록 유다가 그리스도를 제사장들에게 넘겨주었지만, 제사장들은 빌라도에게, 빌라도는 군병들에게 그를 넘겨주었지만, 신약은 하나님이 ‘그를 포기하셨고’ 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셨다’는 것을 모두 암시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당시 일어나고 있었던 일의 심층을 살펴보도록, 또 다락방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겟세마네 동산과 유기의 부르짖음이 의미하는 바를 조사하도록 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죄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명백해졌으므로, 제2부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핵심으로 바로 접근했다. 우리는 처음에 하나님의 존엄과 죄의 흉악함 간의 갈등으로 구성된 용서의 문제로 시작했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다른 ‘만족시킴’이라는 이론들을 거부하긴 했지만, 우리는 제5장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만족시키셔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즉 그분은 모순된 말씀을 하실 수 없으며 거룩한 사랑이라는 그분의 온전한 성품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행동하셔야 한다. 하지만 그분이 어떻게 이것을 하실 수 있었을까? 우리의 대답(제6장에서)은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대속하셨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십자가의 본질이 ‘자기 대속에 의한 자기만족’이라고 감히 주장했다.

 

제3부에서 우리는 십자가 자체를 넘어서 그 십자가의 결과, 즉 그 성취된 것을 세 가지 영역에서 살펴보았다. 그것은 바로 죄인들의 구원, 하나님의 계시, 악의 정복이 그것이다. 구원에 관해서는 우리는 ‘화목’, ‘구속’, ‘칭의’, ‘화해’라는 네 단어를 연구했다. 이것들은 신약의 ‘이미지들’, 즉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그리고 죽음을 통해 이루신 것에 대한 비유들이다. 그러나 ‘대속’은 또 다른 이미지가 아니다. 대속은 그것들 모두의 배후에 놓여 있는 실재이다. 그 다음에 우리는 제8장에서 그분의 사랑과 정의를 십자가에서 발휘함으로 그것을 충분히 또 최종적으로 계시하셨다는 것을 보았다. 대속을 부인할 때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희미해진다. 하지만 그것을 확언할 때 그분의 영광은 밝게 내비친다. 지금까지 객관적인 성취, 즉 죄로부터의 구원과 거룩한 사랑의 계시를 통한 주관적인 영향 양자로서의 십자가에 집중하고 난 후 우리는 ‘크리스투스 빅토르’(Christus Victor)가 세 번째 성경적 주제로서 악과 율법, 육체와 세상과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 및 그분을 통한 우리의 승리를 묘사하는 것이라는 데 동의 했다(제9장).

 

제4부에는 ‘십자가 아래 사는 길’이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그것은 기독교 공동체가 본질적으로 십자가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실로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관계를 철저하게 바꾸어 놓았다. 우리는 이제 계속적인 성찬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제10장),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우리 자신을 주며(제11장), 선으로 악을 이기고자 애쓰면서 우리 원수를 사랑하고(제12장), 십자가에 비추어 고난이라는 복잡한 문제에 직면한다(제13장).

 

 

결-1.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일곱 가지 주장

 

결론적으로 십자가의 편만한 영향력, 즉 우리는 우리의 사고나 삶의 어떤 영역에서도 그 영향력을 제거할 수는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를 선택하는데, 선택한 중요한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그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그의 첫 번째 서신서다. 여기서 ‘남부 갈라디아’와 ‘북부 갈라디아’ 이론에 대해 찬반을 운운할 자리는 아니다. 내용이 로마서와 유사한 점으로 보아 후대에 쓰인 것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갈라디아서에 전제되어 있는 상황은 사도행전의 연대기에 더 잘 맞고 더 이른 시기에 쓰였다고 보는 쪽을 강력히 지지하고 있다. 이 경우 그 서신서는 주후 48년 경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후 15년 이내에 쓰여졌다. 둘째, 그가 자신의 사도적 권위가 인간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변호하는 바울의 갈라디아서는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실제로 그 서신서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일곱 개의 주목할 만한 주장들을 담고 있는데, 그것들은 각각 그 죽음의 서로 다른 국면을 비추어 준다. 그것들을 한데 묶어 놓을 때 우리는 십자가의 편만한 영향력에 대해 놀라울 만큼 포괄적으로 파악하게 된다.

 

1) 십자가와 구원(갈 1:3-5)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이 말들은 바울의 서론적 인사말의 일부이다. 이는 이 서신서에서 앞으로 그의 관심사가 어떤 것이 될 것인지를 나타낸다.

 

첫째, 예수님의 죽음은 자발적인 것이었고 동시에 결정된 것이었다. 한편으로 그분은 자유롭게 또 자발적으로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 다른 한편으로 그분이 자신을 드리신 것은 ‘하나님 곧 아버지의 뜻을 따른’ 것이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의 죽음을 결심하시고 정하셔서 그것을 구약 성경에서 예언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목적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셨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을 자신의 뜻으로 결정하셨다.

 

둘째,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죄를 위한 것이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죄와 죽음은 성경 전체를 통해 원인과 결과로서 절대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보통 죄를 짓는 사람과 죽는 사람은 동일한 인물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죄는 우리가 지은 것인데 죽은 것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이 우리의 죄를 위해 우리 대신 죄의 형벌을 담당하고 죽으셨다.

 

셋째, 예수님의 죽음의 목적은 우리를 구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구원은 너무나 절망적인 곤경에 빠져 있어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하여 행해지는 구조 작전이다. 특별히 그분은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구조하기 위하여 죽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셨으므로, 지금은 두 시대가 중복된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를 옛 시대에서부터 구조하여 시대로 옮기기 위해, 그래서 이미 우리가 다가올 시대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하여 죽으셨다.

 

넷째, 예수님의 죽음의 현재적인 결과는 은혜와 평강이다. ‘은혜’는 값없이 공로 없이 주시는 그분의 은총이며, ‘평강’은 은혜가 이룩한 것으로 하나님과 또 각자와 서로 화목하는 것이다. 다가올 시대의 삶은 은혜와 평가의 삶이다. 바울은 계속해서 다음에 나오는 구절들에서 그것을 언급한다. 거기서 그는 갈라디아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들을 부르신 자를 그렇게 속히 떠나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표현한다(6절). 왜냐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은 은혜의 부르심이며, 하나님의 복음은 은혜의 복음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예수님의 죽음의 영원한 결과는 하나님이 영원히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3-5절에 동일한 문장의 일부로서 나오는 은혜와 영광에 대한 언급은 놀라운 것이다. 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반면에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기독교 신학 전체는 이 표현 안에 다 들어 있다.

 

그렇다면 여기 하나의 함축된 문장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처음으로 말한 십자가에 대한 진술이다. 비록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영원히 결정된 것이었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을 주셨다. 예수님의 죽음의 본질은 우리 죄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우리를 옛 시대에서 구조해서 우리가 현재의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그리고 하나님이 영원히 영광을 받으시는 새 시대로 우리를 옮겨 놓는 것이다.

 

2) 십자가와 체험(갈 2:19-21)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형을 당해 죽으셨다는 것은 확증된 역사적 사실이다. 바울이 그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다고 말한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15-21절은 일반적으로 칭의에 관한 것, 즉 어떻게 의로운 하나님이 불의한 자들을 의롭다고 선포하실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특별히 이 구절들은 죄인이 율법에 의해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바로 이것은 일곱 번 언급되어 있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을 주장한다. 16절에서 세 번이나 사도바울은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스스로 자신을 의롭다 하는 것(self-justification), 곧 율법을 준수함으로 하나님의 용납을 받는 것의 불가능성에 대해 이보다 더 강력하게 진술하기는 어렵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율법은 유죄를 판정하고 그 형벌로 죽음을 선고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율법의 기능은 의롭다함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선고하는 것이다.

 

율법이 나를 율법을 어긴 자로 죽이라고 요구하는데 내가 어떻게 율법을 통해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는가? 오직 율법의 요구 사항을 충족시켜 그것이 요구하는 죽음을 죽는 것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나는 그리스도와 하나이기 때문에 “내가...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19절)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켰다. 왜냐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고’ 그분이 지금 내 안에 살고 계시기 때문이다(20절).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시다. 아니면 분명 나는 여전히 살아 있으므로, 내가 현재 살고 있는 삶은 전적으로 다른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은 것은 옛날의 죄 되고, 반항적이며, 악한 ‘나’이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안에 믿음으로 살아 있는 것은 의롭다함을 받고 정죄함으로부터 해방된 새로운 ‘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해 죽으셨으며 나는 그분과 함께 죽어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고 죄에 대한 적정한 형벌을 갚았다. 그러고 나서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살아나 현재 살아 계시며, 나는 그분을 통해 살아서 그분의 부활의 생명에 참예한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는다(21절). 또한 로마서 6장에서처럼 그것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이용하려 들지 않는다. 그렇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그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된 것이라고 선포하면서 그분의 은혜를 찬미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것은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의 의로운 지위를 율법을 준수함으로 획득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필요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3) 십자가와 전파(갈 3:1-3)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그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했으면서 어떻게 그들 자신의 공로에 의해 그 삶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이 본문에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에 대해 배울 것이 매우 많다.

 

첫째, 복음 전파는 십자가를 선포하는 것이다. 부활이 덧붙여져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갈1:1; 2:19-20). 예수님이 한 여자에게서 율법 아래 나신 것도 덧붙여져야 한다(갈 4:4). 하지만 복음은 본질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한 좋은 소식이다.

 

둘째, 복음 전파는 십자가를 눈에 보이게 선포하는 것이다. 바울은 ‘프로그랍호’(progravfw)라는 주목할 만한 단어를 사용한다. 보통 그것은 ‘미리 쓰다’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내가 이미...기록한 것과 같으니”(엡 3;3)의 경우다. 하지만 ‘그랍호’(gravfw)는 때때로 쓰는 것보다는 펜이나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뜻할 수 있고, ‘프로’(prov)는 시간적보다는 공간적으로 ‘앞에’라는 뜻일 수 있다. 복음 전파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예술 또는 은사 중 하나는 사람들의 귀를 눈으로 바꾸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도록 하는 것이다.

 

셋째, 복음 전파는 십자가를 시각적으로 현재의 실재로서 선포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적어도 바울이 그 글을 쓰기 15년 전에 그리고 우리보다는 약 이천 년전에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바울의 전파는 그것을 그들의 눈앞에 가져와 그들이 그것을 보도록 했고, 그들의 실존적 체험에로 가져와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거부해야만 하도록 만들었다.

 

넷째, 복음 전파는 십자가를 시각적이고 현재적이며 영원한 실재로서 선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울처럼 사람들의 눈앞에 플래카드를 붙여야 하는 것은 단지 ‘크리스토스 스타우로테이스’(Cristov" staurovwtei'";부정과거)가 아니라 ‘크리스토스 에스타우로메노스’(Cristov" ejstaurovmevnvov";완료)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일을 결코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다섯째, 복음 전파는 또한 개인적인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십자가를 선포하는 것이다. 바울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그들이 단지 무심코 바라보고 응시하도록 하기 위해 그들 눈앞에 보여 주는 것이 아니다. 그의 목적은 그들에게 와서 그들의 십자가에 못박힌 구세주이신 그분을 믿으라고 설득하는 것이었다.

 

4) 십자가와 대속(갈 3:10-14)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임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려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이 구절들은 십자가의 필요성, 그 의미, 그 결과에 대한 가장 명확한 해설 중 하나다. 바울은 너무나 강한 용어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때문에 어떤 주석가들은 그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은 바 되셨다’(became)고 쓴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것을 좀 약화시키려는 시도가 몇 가지 있어 왔다. 첫째로, 바울은 ‘저주’를 ‘율법의 저주’라고 부름으로써 그것을 의도적으로 비인격화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신명기 21:23에는 ‘하나님의 저주’라고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이 성경을 부인하고 있다고는 진정 생각할 수 없다. 둘째로, 그분이 저주가 ‘되신’ 것은 그분이 그들의 심판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어긴 자들에 대한 공감을 표하신다는 표현이라는 주장이다.

 

셋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셨다(Christ became 'a curse' for us)는 것은 그분이 실제로 저주받았다(he was actually 'cursed')는 말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예리미아스에 따르면, “저주”는 “‘저주받은 자’를 환유한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 구절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저주받은 자로 만드셨다”고 해석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고후 5:21)이라는 말고 유사하다. 또 우리는 그 두 구절을 받아들이고 진정 그 구절들이 나타내는 진리로 인해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분이 그리스도를 죄와 저주로 만드신 동안에도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화목하게’(고후 5:19)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울의 가르침이 갖고 있는 논리를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첫째, 율법에 의지하는 자는 모두 저주 아래 있다. 10절 초두에서 바울은 그가 2:16에서 세 번 사용한 표현, 곧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이라는 표현을 다시 사용한다. NIV에는 그것이 ‘율법을 준수하는 것에 의지하는 모든 자들’이라고 좀 더 상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바울이 그런 자들을 ‘저주 아래’ 있다고 선포할 수 있는 이유는 성경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참고, 신 27:26). 어떤 사람도 율법이 요구하는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아무도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경은 또한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합 2:4), ’믿음으로‘ 사는 것과 ’율법으로‘ 사는 것은 두 개의 완전히 다른 상태라고(12절) 말하고 있다. 결론은 불가피한 것이다. 비록 이론적으로는 율법을 지키는 자들은 살 것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우리 중 아무도 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중 아무도 그것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하셨다. 이것은 아마 신약에 나오는 대속에 대한 가장 분명한 진술일 것이다. 율법을 어긴 데 대한 저주가 우리에게 놓여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대신 저주받은 바 되심으로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셨다. 그분은 그것을 떠맡으심으로, 우리가 거기에서 피하도록 하셨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의 저주를 지셨다는 증거는 그분이 나무에 달리신 것이다. 왜냐하면 신명기 21:23에서 나무에 달린 사람은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선포하기 때문이다(13절).

 

셋째, 그리스도께서는 그 안에서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서(14절) 이것을 행하셨다. 사도바울은 의도적으로 저주의 말에서 축복의 말로 옮겨 간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복을 보증해 주시 위해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 하나님은 수십 세기 전에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을 통해 이방 나라들을 복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이 약속된 복은 바울은 여기서 ‘의로 정하실 것’(8절)과 ‘성령’(14절)이라고 해석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은 이처럼 풍성한 복을 받는다.

 

요컨대 우리는 불순종 때문에 율법의 저주 아래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대신 그 저주를 지심으로 그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셨다. 그 결과는 저항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한 그분의 거룩하신 사랑으로 그렇게까지 하셨으며, 우리가 오늘날 누리는 복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지신 저주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우리의 겸손한 경배를 고무시킨다.

 

5) 십자가와 핍박(갈 5:11-6:12)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이 두 구절 모두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언급되어 있는데, 갈 5;11에서 그것은 ‘거치는 것’(스칸달론, skavndalon; 덫, 올가미, 죄에 빠지는 것, 함정)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 두 구절 모두에 또한 핍박에 대한 언급이 있다. 갈 5:11에 따르면 바울은 십자가를 전하기 때문에 핍박 받고 있다. 갈 6:12에 따르면 거짓 교사들은 십자가 대신 할례를 전함으로써 핍박을 면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복음 전도자, 목사, 교사들은 할례나 십자가 중 어느 한 가지만 전할 수 있을 뿐이다.

 

‘할례를 전하는 것’은 율법, 즉 인간의 공로에 의한 구원을 전하는 것이다. 그런 메시지는 십자가의 걸리는 것, 즉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스스로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제거해 버린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핍박을 면하게 해준다.

 

‘십자가를 전하는 것’(3:1에서처럼)은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이다. 그런 메시지는 거리끼는 것(고전 1:23)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교만에 심하게 거슬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때문에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핍박받게 한다.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께 대항하는 반항자이며, 그분의 의로운 심판 하에 있고 만일 그들을 내버려두면 길을 잃으며, 그들의 죄와 저주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하신 그리스도는 유일하게 효력 있는 구세주라는 것을 전하든지, 아니면 인간의 잠재력과 능력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것은 단지 그것을 격려하기 위해서만 이야기하며,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고 그로 인해 우리로 하여금 더 열심히 노력하도록 고취시키기 위해서만 필요하다고 말하든지 둘 중 하나만 할 수 있다.

 

전자는 신실하게 되는 길이고, 후자는 인기 있게 되는 것이다. 신실하면서 동시에 인기 있게 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예수님의 경고를 다시 들어보아야 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눅 6:26). 이와는 대조적으로 만일 우리가 십자가를 전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십자가 때문에 끈질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6) 십자가와 거룩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도덕적 자유의 의미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 그는 그것이 방종이 아니라 절제이며, 우리 자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라고 선포한다(13절). 이 양자 택일의 배후에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의식하고 있는 내적 갈등이 놓여 있다. 사도 바울은 그 주인공들을 ‘육체’(우리가 지니고 태어난 우리의 타락한 본성)와 ‘성령’(우리가 중생했을 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 자신)이라고 부른다. 16-18절에서 그는 그 둘 간의 다툼을 묘사한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이다.

 

육체의 행위(19-21절)에는 성적 부도덕, 종교적 배고(우상 숭배와 술수), 사회적 파괴(증오, 불화, 시기, 분냄, 이기적, 야심, 당 짓는 것), 그리고 제어되지 않은 육체적 욕망(술 취함, 방탕)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22-23절)는 성령께서 성령 충만한 사람들 안에 성숙하도록 하시는 은혜들(하나님과 관련한 사랑, 희락, 화평과 서로에 관한 오래참음, 자비, 양선과 우리 자신에 관한 충성, 온유, 절제를 포함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령의 소욕이 육체의 소욕을 능가하도록 할 수 있는가? 바울은 그것이 우리가 각각에 대하여 취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고 대답한다. 24절에 따르면 우리는 육체와 함께 그 저오가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 25절에 따르면 우리는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해야’ 한다.

 

갈라디아서 2:20과 5:24에 나오는 십자가에 못박는 것은 앞 장에서 언급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두 개의 서로 매우 다른 것을 언급한다. 첫 번째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결과로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다고 말하며,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옛 성품을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 행동을 취했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에 참예함으로 우리가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두 번째는 육체가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함으로 우리가 육체의 권세에서 자유로워졌다는 것에 대해 말한다. 이 두 가지, 곧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수동적)과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능동적)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7) 십자가와 자랑(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영어에는 ‘카우카오마이’(kaucavomai)에 꼭 들어맞는 동의어는 없다. 그것은 ‘자랑하다. 영광을 구하다, 믿다, 기뻐하다, 즐기다, 위해서 살다’ 등의 뜻을 갖고 있다. 우리의 자랑 또는 ‘자만’의 대상은 우리의 시야를 가득 채우고, 우리의 주의를 모조리 거기에 쏠리게 하며, 우리의 시간과 정력을 빼앗는다. 한마디로 우리의 ‘영광’은 우리가 사로잡혀 있는 어떤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돈, 명예, 권력에 사로잡혀 있다.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거짓 교사들은 그들이 회심시킨 자의 숫자에 사로잡혀 있는 승리주의자들이다(13절). 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에 사로잡혀 있었다. 평범한 로마인에게 수치와 불명예, 심지어 혐오의 대상으로 여겨졌던 것이 바울에게는 자랑이요 영광이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마음에 중심되는 것이었으며 항상 교회의 신아에 중심적인 것이 되어 왔기 때문이다.

 

첫째,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은 그것을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방법으로 보는 것이다. 모든 질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잃은 바 되고 죄에 가득 찬 죄인인 우리가 어떻게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바울이 유대주의자들과의 열정적인 격론 가운데 갈라디어서를 단숨에 쓴 것은 바로 이 질문에 큰 소리로 분명하게 대답하기 위해서였다. 일부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 자신의 공로를 신뢰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빼놓고는 자랑하는 것을 금하신다. 십자가는 모든 다른 종류의 자랑을 배제해 버린다(롬 3;27).

 

둘째,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은 그것을 우리의 자기 부인의 모형으로 보는 것이다. 비록 바울이 단 하나의 십자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만 썼지만, 그는 두 개 또는 세 개의 십자가에 못박힘에 대해 언급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못박히신 그 똑같은 십자가 위에서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힌다.’ 이렇게 십자가에 못박힌 즉 거부된 ‘세상’은 물론 세상의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왜냐하면 우리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도록 부르심 받았기 때문에), 세상의 가치관, 무신론적 물질주의, 허영심과 위선을 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그것을 거부하라고 명령받기 때문이다.

 

‘육체’는 이미 십자가에 못박혔다(5:24). 이제 ‘세상’이 십자가에서 그것과 함께 못박힌다. 우리는 6:14에 나와 있는 바 두 가지 주된 십자가에 못박힘(그리스도의 못박힘과 우리의 못박힘)을 계속 밀접하게 관련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꺼이 심지어는 열망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십자가를 지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뿐이다. 그럴 때만 우리는 바울의 말을 따라 우리가 십자가 외에는 자랑하지 않는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영역에는 십자가가 중심이며 편만해 있다는 것을 좀 더 확고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그것을 순서대로보다는 신학적으로 재정리하여 분류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십자가는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근거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현재의 악한 세대에서 건지셨고(1:4),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3:13).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이 이중적 속박에서 해방하신 이유는 우리가 그분의 성령으로 의롭다고 선포되고 성령의 거하심을 받아 하나님 아펭 그분의 아들딸로서 담대하게 서도록 하기 위함이다.

 

둘째, 십자가는 우리가 성화되는 수단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갈 2:20). 우리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갈 5:24). 그리고 세상은 우리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우리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다(갈 6:14). 그러므로 십자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 우리의 육체와 세상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포함한다.

 

셋째, 십자가는 우리가 증거할 주제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사람들의 눈앞에 밝히 보여서 그들이 보고 믿도록 해야 한다(갈 3:1).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는 할례(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십자가(그리스도의 공로)를 전한다. 그것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갈 5:11; 6:12).

 

넷째, 십자가는 우리가 자랑할 대상이다. 하나님은 십자가 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 자랑하는 것을 금하신다(갈 6:14). ‘그리스도의 원수’(빌 3:18)가 되는 것은 그 목적에 대항하는 것이다. 자기 의(의롭다함을 받기 위해 십자가를 바라보는 대신), 방종(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십자가를 바라보는 대신), 이것들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만드는 왜곡된 것들이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 받았던 상처와 흉터들, 그를 그리스도의 진정한 종으로 낙인찍은 ‘흔적’(스티그마타, stivgmata)에 대해 썼다.

 

예수님의 흔적은, 육체가 아니라면 영 속에, 모든 그리스도인 제자에게 그리고 특히 모든 그리스도인 증인에게 그들의 진정함을 입증하는 표지로 남아 있다.

 

십자가를 전할 수 있는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이다.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했다. 세상은 모든 전파자에게 말하고 있다. 당신 손에서 못 자국을 모지 않고는 믿지 않겠노라. 그것은 맞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은...그리스도와 함께 죽은...그런 사람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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